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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쩨리 Oct 07. 2017

군신사가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남한산성>

  국사를 배울 때 싫어하던 조선왕 몇 중 하나가 인조였다. 볼모로 보낸 세자-소현세자-가 돌아오자 그는 스스로 얼마나 무능한지를 깨달았던건지 자기 자식을 질투했다. 그리고 어제 그렇게 인조가 세자를 보내야 했던 병자년의 일을 다룬 영화를 보고 왔다. 마치 실록의 한 페이지를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싸우기를 종용하는 임금은 교지에 '군신사가가 하나가 되어'를 주창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안에서부터 무너졌으며 청의 칸이 원하는 대로 그가 쳐들어가 항복을 받아낸 것이 아니라 인조가 성에서 나옴으로써 항복을 얻어냈다. 그 이유는 결국 '군신사가'에서 임금인 군(君)과 신하인 신(臣)조차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신하, 그리고 나머지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 김상현

  남한산성에는 (문관만 치자면) 오직 두 명의 충신만 존재한다. 둘은 서로 노선을 달리하나, 서로 충신임을 알고 있다. 마주쳤을 때 서로 공손히 인사를 하고, 최명길이 끝까지 김상현을 궁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것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김상현은 싸우기를 주장하는 충신이다. 그가 얼마나 충신이냐 하면, 얼음길을 안내하는 노인이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나중에 청나라 군대도 얼음길을 안내해주고 곡식이나 얻을 요량이라 하자 어린 손녀가 있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얼음길의 끝에서 칼로  노인을 베어버릴 정도이다. 이후 청나라 군대의 얼음길을 안내하는 것은 남한산성을 무너뜨리는 데에 한 몫할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첫 장면에서 나오는데 이후 국가의 대의(義)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소의(小義)가 스러져감을 알리는 첫 죽음이다. 

최명길

  최명길은 생의 길로 화친을 주장한다. 그는 나라와 임금과 백성을 살리기 위해 몇번이나 적진을 왕래하고 스스로 만고의 역적이 될 것을 자처하며 마지막 답서를 쓴다. 유일하게 직접 적진을 확인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남한산성 안에서 가장 청나라 군대를 잘 아는 신하이다. 얼마나 청군이 견고하고, 강인하며, 우리네 군사와 달리 먹을 것과 병장기가 풍부함을 너무나 잘 알기에, 싸움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낼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갈등한다. 그 갈등은 이시백과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어느 편이냐 묻는 최명길의 질문에 이시백은 어느 편도 아니고 그저 다가오는 적을 물리칠 뿐이라고 하자, 최명길은 차라리 자신이 그럴 수 있었으면 한다고 대답한다. 그만큼 최명길은 화친이라는 결론을 내기 전까지 많은 갈등을 한 것이다.

  김상현과 최명길을 제외한 신하들은 그저 자기 목숨부지하기 바쁜 인간들이다. 그 신하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영상대감이다. 영상은 적진은 눈으로 확인하지도 못했으면서 명분과 허울뿐인, 심지어 그 명분조차 논리가 없는 주장만을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보면 제일 먼저 뒤졌으면  사라졌으면 하는 인물이다. 일신의 목숨과 명예가 중요한 영상은 제찰사의 임무는 하지도 않으면서 제찰사임을 내세워 소중한 군사 300명을 죽음으로 몰아냈으며, 그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인 300명의 시체를 성첩에서 확인할 용기도 없는 개새소인배이다. 적의 실상도 모르고 본인들의 상황조차 모르면서 그저 명분에만 기대어 남한산성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린 수많은 신하들의 대표이다. 


군(君)조차 하나가 되지 못해

인조

   실제로 역사적으로도 선조와 더불어 많은 비난을 받는 인조는 영화에서 그 찌질함과 무능함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영화를 본 관객의 공분을 사기에는 충분하다. 매일 아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과 밥을 먹고, 모두가 거무튀튀한 옷을 입을 때 혼자 하얗고 고운 옷을 입고 성첩조차 둘러보지 못한 자가 적은 커녕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몰랐을 것이다. '아껴먹되 너무 아껴먹지는 말라'처럼 '술로 취하기는 하되 너무 취하지는 말라' 같은 개소리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은 한번도 배를 곪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요, 추위에 떨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요, 병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내리는 결단에 확신이 없는 인조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영상을 비롯한 다른 신하들의 이야기를 듣고, 김상현의 이야기를 듣고도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 마지막에는 그가 제일 신뢰하는 최명길의 생각을 주로 따른다. 그렇게 확신과 리더십이 없는 무능하고 무지한 인조라는 리더는 헛되이 300명의 병사를 죽이고도 그들의 영혼을 달래주기는 커녕 엉뚱한 장군에게 책임을 물어 사기를 떨어뜨릴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인조를 마냥 비난할 수도 없으며 무작정 최명길과 김상현을 칭송하기 어렵다. 영화는 얼빡샷 클로즈업을 많이 한다. 발화자가 바뀔 때마다 발화자의 얼굴을 비춰주는데 특히 인조, 최명길, 김상현에게 그렇다. 이는 마치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데(연극을 볼 때는 관객이 발화자를 향해 시선을 돌리므로) 덕분에 그리고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까지 더해져 우리는 인조의 갈등을, 최명길이 화친을 주장하면서도 어떤 갈등을 하고 있는지를, 김상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인조와 최명길, 김상현의 갈등을 같이 공유하게 된다.


이 나라가 내게 해준게 뭐야? 서날쇠와 정명수

서날쇠

  대개 사극은 왕족과 장군, 양반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것은 아마도 평민들의 이야기는 기록을 찾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은 평민들의 이야기를 그렇게 지루하지 않지만 강력하게 집어 넣는다.  <남한산성>을 보다보면 말을 먹이기 위해 군사들로부터 가마니를 빼앗고 초가집의 지붕을 거두어 간다. 갓난아이가 있는 집이라도, 나이가 많이 든 노인이 있는 집이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궁으로 돌아가면 나중에 큰 상을 내릴 것이다'라는 메아리조차 되지 못할 허망한 말만 내뱉고 가져간다. 이렇게 희생되는 평민들의 소의는 서날쇠라는 전형적인 캐릭터의 전형적인 서사로 드러난다.

  비록 서날쇠라는 캐릭터는 지극히 전형적이나(정묘호란 때 아내와 아이를 잃은 아버지) 전형적인만큼 평민들의 이야기를 대표하는 캐릭터이다. 격서를 가지고 목숨을 걸고 가는 서날쇠에게 김상현은 '큰 상을 내릴 것이다'라는 또다시 허망한 약속밖에 할 수 없다. 이미 아내와 아이를 잃어버렸고, 생계를 포기한 그에게 그 말은 설사 사실이라 해도 무의미하다. 그가 결국 김상현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는 까닭은 나라를 위함 때문이 아니요, 그와 그가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목숨 걸고 도착한 도원수의 군영에 희망은 없었다. 대장장이라는 말을 듣자 바로 태도가 돌변하고 그들의 목숨을 아끼고자 서날쇠를 죽이려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남한산성에서 그렇게 부르짖었던 국가의 존속이 다 뭔가 싶다. 


통역관 정명수

  청나라 군대의 통역관 역할을 하고 있는 정명수는 어떻게 보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백성에게 과연 어떤 의미였냐함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조선에서 노비로 태어나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그는 영상대감이 어떻게 조선사람으로써 청나라 군대에서 통역관 역할이나 하고 있냐는 말에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그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며 역정을 낸다. 사실은 서날쇠나 정명수나 조선이라는 나라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정명수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결코 그의 소의를 희생시키지 않고 잘 산다. 그는 여전히 상투를 틀고 있어 조선인으로써 정체성을 온전히 버리지는 않았으나 칸이나 청나라 군대의 대장을 통역을 할 때면 마치 호랑이의 권위를 등에 업은 여우처럼 조선인들을 업신여긴다. 우리가 정명수의 서사를 알게되는 순간,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백성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게되는 순간 우린 함부로 정명수를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살아남음의 의미, 나루

나루

  <남한산성>에서 중요한 몇 시퀀스 중 하나는 바로 칸이 자신이 보내는 교지를 읊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명분을 내세웠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결과가 어떤 결과를 냈는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말먹이를 만들기 위해 지붕이 벗겨진 초가, 먹을 게 없어서 잡아먹었던 말의 뼈, 제찰사 때문에 허망하게 죽어간 300명의 시체, 성첩 위에서 추위에 떠는 병사들을 찬찬히 보여주면서 명분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드러낸다. <남한산성>은 종종 죽음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까마귀가 죽은 시체의 눈을 파먹는-잔인하지만 전형적인-장면, 홍이포가 성벽을 때려 뒷통수가 날아가 죽은 병사의 모습도 서슴없이 드러내는데 그 덕분에 우리는 실체 없는 명분이 살아있는 실체를 도륙하는 걸 보다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때문에 봄이 오면 꺽지를 잡아주겠다던 나루의 존재는 중요하다. 홍이포가 남한산성을 무너뜨리기 시작할 때 화친을 하느니 죽는 게 낫다던 김상현은 나루를 찾아 보호한다. 아마도 김상현은 홍이포의 대포소리가 멈추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의 품에서 살아있던 나루를 본 순간 최명길이 원하던 '삶의 길'이 뭔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최명길이 살리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를 보았을 것이다. 

  자꾸만 죽음을 얘기하는 김상현에게 미래를 불어넣는 존재가 나루이다. 나중에 민들레가 피면, 그래서 송파강이 녹으면, 꺽지를 꼭 잡아주겠노라 하는 나루는 최명길이 만고의 역적을 자처하고도 살리고자 한 게 무엇인지를 대표하는 캐릭터이다. 


  <남한산성>은 비록 흥미진진하고 전쟁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액션 같은 걸 내세우는 영화는 아니다. <남한산성> 안에서 마주했던 고뇌와 삶과 그리고 죽음에 대한 영화이다. 그리고 최명길의 선택이 얼마나 용기있는 선택이었는지를, 그러니까 명분이나 명예가 아니라 인정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한 그 용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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