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더 페이버릿' 페이버릿
얼마전 열린 제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올리비아 콜맨(Olivia Colman)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수상은 콜맨이 했는데 카메라에 엠마 스톤(Emma Stone)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잡혀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덕분에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를 보고자 하는 큰 결심이 섰다. 어안 렌즈를 활용해서 와이드하게 화면을 담는 방식이나 현악기가 가진 특징을 잘 살린 배경음악이 등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는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가 되었다.
*영화에 쿠키 영상 없음
*스포라고 생각할 만한 이야기기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네이버 영화에는 '권력을 향한 그녀들의 미친 발버둥이 시작된다!' 라고 줄거리에 볼드 처리를 해놨다. 그래서 마치 정치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는 여자들의 암투 이야기처럼 보인다. 마치 사라 제닝(말버러 부인)과 애비게일은 여왕의 마음을 차지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애비게일이 여왕의 마음을 훔치고, 할리에게 내각 수장 자리로 딜을 걸면서 다시 귀족 신분을 얻어낸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더 페이버릿(The Favorite)'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가장 좋아하는 것. 나는 이 영화가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애비게일은 이 영화에서 할리와 더불어 가장 정치적인 인물이다. 그는 원래 귀족 아가씨였다가 아버지 잘못으로 인해 팔려가고, 이런 저런 비참한 일을 당하며 궁정으로 흘러들어 온다. 그가 얼마나 정치적이냐면, 처음에 궁으로 와 사라(말버러 부인)에게 일자리를 부탁할 때 '아이들이랑 놀아줄 괴물'이라며 빈정거리는 사라의 말에도 호응하며 괴물 흉내를 내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마치 그가 아주 순수한 시골 소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친절한' 그가 여왕에게 베푼 호의가 어떻게 돌아오는지 깨달은 그는 태도를 바꾼다. 여왕과 사라(말버러 부인)의 관계를 알아챈 그는 여왕의 좋아하는,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성심성의껏 응한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는 시종일관 여왕을 거짓으로 대한다. 진심이 아니면서 '아름답다'고 말하고 까치집같은 여왕의 머리를 빗으며 '머릿결이 좋다'고 하고 종당에는 발로 밟아 괴롭히면서 토끼들을 보고 '이쁘다'고 한다.
이런 그의 태도는 그가 여왕을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 이유로 호의를 베푼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거짓으로 여왕을 꾀어내고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해주며 여왕의 애정을 얻어 마침내 귀족 신분을 되찾고 사라를 궁에서 쫓아낸다. 오로지 거짓으로 일관하는 그는 비단 여왕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를 좋아하는 마삼에게도 똑같이 대한다. 마치 호의가 있는 것처럼 놀고, 꾀고, 유혹한다.
사라의 말에 괴물 흉내까지 내면서 고개를 숙이던 그가 마침내 원하던 힘을 차지하고 사라를 빈정거리는 탣 변화에서 결코 순수하지 않음을, 아주 정치적이고 교활하고 사라의 말처럼 뱀같은 인물임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사라(말버러 부인)는 애비게일와 완전히 대비되는 인물이다. 그가 여왕 옆에 붙어 있고 여왕을 신경쓰는 것은 여왕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애비게일과는 게임의 목적 자체가 다르다. 그는 그냥 여왕을 사랑할 뿐이다. 이런 그의 감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대사가 궁에서 쫓겨나고 쓰는 편지에 쓰는 문장이다.
칼로 당신의 눈을 찌르는 꿈을 꿨어요
만약 그가 정치적 목적으로 앤을 대했다면 여왕을 '몰리 부인'이라고 부를 이유도 없고, 쫓겨난 뒤에 굳이 저런 문장을 쓸 필요가 없다. 저 문장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핫초코를 먹고 싶어하는 여왕에게 위장에 해가 된다며 말리고, 여왕이 해야하는 일들을 대신해주며 궁과 나라를 꾸린다. 그가 국정에 나서는 것은 결코 권력을 차지하고 나라를 손에 쥐고 흔들고자함이 아니다. 그는 여왕과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뿐이다. 그가 예산서에 결제를 하면서 크림이 왜이렇게 비싸냐 타박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건 그런 그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가 애비게일과 완전히 대비되는 인물인 또다른 이유 중 하나는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여왕에게 버림받는 그 순간까지도 마치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따끔하게 조언을 하듯, 오래된 연인이 서로 못생겼다며 장난을 치듯 여왕에게 '오소리 같다'고 한다.
거짓말을 안하는게 사랑이니까
거짓으로 달콤하게 여왕을 감싸는 애비게일과 달리 사라(말버러 부인)은 순수하게 여왕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솔직하게 대한다. 여왕이 벌이는 자살 행위가 자기에 대한 일종의 시위임을 아는 그는 '돌위에 떨어져야 한다'며 냉랭하게 쏘아붙이고 자칫 다른 나라에 우스워 보일 수 있는 화장을 하고 나오자 '오소리 같다'며 직언한다.
이렇게 쏘아붙이고, 어떤 걸 하지말라고 하는 그를 보면 아주 냉정한 인물 같다. 그러나 그는 그러면서도 엄마처럼 앤을 돌본다. 행여 아플까 일부러 설탕을 못 먹게 하고 통풍에 고통스러워 하는 여왕을 보살피며 일부러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말을 타러 갈 때는 시종에게 시켜도 될 일을 엄마가 외출을 할 때 아기 옷을 입히듯 갑옷 하나하나 자기 손으로 입혀준다.
그래서 나는 사라(말버러 부인)을 존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렇게 배신당했음에도 끝까지 여왕에게 거짓을 고하지 않고, 버림받는 그순간까지 여왕을 사랑했으며, 사랑하는 여왕과 국가를 위해 머리 아픈 일들을 해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예산서를 꼼꼼히 살피고 남편을 전선에 내보냈다. 그는 이처럼 강인한 인물이다. 여왕이 보낸 군인들을 보고도 그저 영국이 지겨워졌다며 냉소를 지을 뿐이다.
여왕을 보고 있으면 왜 올리비아 콜맨이 상을 탔는지 알 수밖에 없다. 무력하고, 슬프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아이같은 늙은 여왕의 모습을 완벽히 연기한다. 여왕은 곧잘 울고 사라(말버러 부인)가 없으면 아이가 떼를 쓰듯 울고 소리를 지른다. 이런 여왕의 마음은 애비게일 같은 인물이 침투하기 참 좋은 상태이다. 그는 안다. 애비게일이 결코 진심이 아님을. 그러나 그런 거짓이 주는 달콤함 때문에, 토할 걸 알면서도 설탕 케이크를 입에 쑤셔넣듯, 애비게일을 곁에 둔다. 사라(말버러 부인)가 사라지는 순간, 항상 챙김을 받던 그가 오히려 스스로 국정을 해나가야 하고, 오히려 애비게일을 보살피기도 한다. 편지를 그렇게 갈구하는 모습이 사라(말버러 부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애비게일이 태워버려 끝끝내 편지를 받지 못하자 여왕은 분노에 차서 애비게일의 말이 거짓임을 뻔히 알면서도 국고를 횔령한 죄로 사라(말버러 부인)을 추방한다. 앤 여왕은 이 영화에서 약하디 약하면서도 강하고, 얄미우면서도 안쓰러운 인물이다.
이 영화는 독특하게 마치 VR 화면처럼 와이드샷을 자주 쓴다. 특히 인물들의 감정을 극적으로 연출할 때 그렇다. 그래서 여왕에게 너무나도 긴 복도가 더 길게 보이고, 애비게일에게 웅장하고 거대해 보이는 방이 더 크고 거대해 보이며, 위엄있고 강인한 사라(말버러 부인)의 모습이 더 강력해 보인다. 여기에 더해서, 인물들의 감정이 고조될 때 현악기가 연주하는 멜로디를 반복해서 들려준다. 사라가 하필 애비게일과 여왕이 잔 밤에 여왕을 찾아가는 장면이나 애비게일이 여왕과 사라(말버러 부인)의 관계를 알게 되는 그 순간들마다 사람의 신경을 땡기는 듯한 배경음악 때문에 관객은 그 순간에 더욱 몰입하고, 인물들의 감정을 더 잘 느낀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라고 했지만, 여왕의 감정을 보여주는 방식-특히 무도회에서 다른 남자와 춤추는 사라(말버러 부인)를 보는 여왕의 얼굴 클로즈업 샷-이나 사라(말버러 부인)의 여앙에 대한 감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을 보면 도저히 코미디라고 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애비게일, 애정 자체를 사랑하는 여왕, 그리고 그런 여왕을 사랑하는 사라(말버러 부인). 이렇게 이 영화는 명백히 '좋아한다(사랑)'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