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조지 웰스 [모로 박사의 섬] 책 리뷰
1.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문제적 고전 SF소설
고전 SF 작가 중 발군의 능력을 자랑하는 H. G. 웰스는 [타임머신], [우주전쟁], [투명인간] 등의 걸출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뛰어난 고전 작가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웰스도 놀랍도록 많은 글을 발표했습니다. 수많은 장, 단편 소설은 물론이고 사회 제도와 구조와 현상에 대한 논픽션, 기사 등을 써냈습니다. 너무 오래전이라 우리나라에 번역된 글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국내에 번역된 웰스의 작품 중에서 전통 SF 소설과 조금 거리가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품이 바로 이 소설 "모로 박사의 섬"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SF 보다는 호러나 스릴러에 더 가까운 느낌이 나는 이 작품은 웰스의 생물학적 지식과 종교관, 세계관 등이 두드러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섬이라는 갇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믿기 어려운 일을 소재로 풀어내는 이 소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이란 어떻게 정의되고 만들어지는가?', '신과 종교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의 많은 질문을 던지며 독자를 괴롭힙니다. 뿐만 아니라 소설의 스토리 자체가 기분 나쁘고 더욱이 소설 속 상세한 묘사들이 독자를 떨떠름하게 만듭니다. 심각한 각종 질문들을 고민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이런 상황과 서스펜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존재들이 그득한 미지의 섬에는 모로 박사와 몽고메리라는 인간들과 인간을 닮았지만 불완전하고 이상한 유전자 변형 동물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동물의 유전자뿐 아니라 외관 등의 변형을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있어 그렇다 치고 읽기 신공이 필요한 부분 때문에 정교한 SF소설이라 보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섬에 외부 인간이 끼어들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이벤트를 부여해, 한정된 섬이라는 공간에서 벌이는 일종의 사고 실험 같은 이야기를 창조해냈습니다.
웰스가 창조해낸 이런 기묘한 섬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각자 자기가 속해 살아가는 사회와 공동체의 의미, 인간의 본성과 도덕률, 사회적 합의에 의한 규범의 문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규정하는 속성, 진화와 신의 의미 등을 복합적으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소설이 발표될 당시 사회적 상황에 국한되지 않고 어느 시대에도 비교 판단해 읽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의 힘을 느끼게 됩니다.
2. 인간의 과학과 의술, 생체실험은 정당한가?
소설에서 모로 박사는 외과술과 유전학적 지식을 통해 동물을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재창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인간이 불완전한 만큼 인간을 통해 창조된 과도기적 생물체 들은 대체로 불완전하고 기괴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과학적 성취와 발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로 박사는 동물 생체실험에 해당하는 변형 수술에 대한 어떤 도덕적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동물들의 외형뿐 아니라 생각이나 태도, 풍습 등을 인간에게 끼워 맞추려는 시도를 지속하고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사람으로 일반적인 사고와 관점을 가진 주인공 프렌딕의 눈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상한 일로 비칩니다. 그는 동물들이 실험 중에 받는 고통과 변형된 존재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불편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아마도 주인공의 기독교적 종교관과 세계관은 물론 도덕관에도 반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편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겁니다. 인간이란 워낙 한번 굳은 생각이나 시각이 좀처럼 바뀌기 힘든 고집스러운 면이 있으니까요.
이 섬에서 벌어지는 동물 생체실험이 궁극적인 과학적 진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의 잔인함에 대해 경계하고 금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지게 될 것 같습니다. 적어도 동물들의 권리와 존엄이 강조되고 있는 우리 시대에 이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동물 생체 실험을 편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부분은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입니다. 인간화 실험을 당한 동물들을 묘사하는 방식을 보면 하나같이 그들은 인간처럼 되기를 바라고, 왜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해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원래의 동물성으로 회귀되는데, 이를 마치 더러운 저주에 걸린 탓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인간은 인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왔지만 이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지나친 인간중심주의는 또 하나의 고민거리를 남겼습니다.
3. 인간 세계의 독특함, 종교의 위험성
동물 인간들이 후반부로 가면서 점점 원래의 특성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들이 타자를 인지하고 존경하는 기본 전제는 상대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는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돈이 엄청 많거나 권력을 가지면 더 인정받는 인간 세상과 어떤 면에서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동물 인간들의 태도를 대하면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과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현대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하는 SF 소설에서 마주하는 인간 존재 문제에 대한 의문과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또 한 가지 큰 틀은 종교에 대한 풍자입니다. 기본적으로 신과 종교적 행위에 대한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킨 모로 박사가 맞이하는 최후를 보노라면 종교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관점이 비교적 직설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물 인간들에게 종교는 그들을 억압하고 억누르는 하나의 올무에 불과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들이 애초의 동물로 회귀하는 것을 늦추는 하나의 방편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결과적으로 신의 존재로 그들을 강제하는데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종교가 종교답지 못하고 현실정치와 이기주의, 배금주의 등과 뒤섞인 듯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기에 이 소설이 내포하는 의미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종교가 특정 집단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발현될 때 그 집단과 사회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 고민을 던져주는 소설입니다.
사실 [모로 박사의 섬]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종 문제의식을 몽땅 무시하고 그저 신기하고 무서운 이야기로만 읽어도 읽는 재미와 흥미가 가득한 소설입니다. 끝까지 스릴 넘치고 긴장감을 유지하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여러 번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그중 특히 눈에 띄는 영화는 발 킬머가 몽고메리로, 말론 브란도가 모로 박사로 등장하는 영화 [닥터 모로의 DNA]입니다. 안타깝게도 전반적인 설정을 그대로 차용했지만 원작 소설과는 결이 너무 다른 영화라 별도로 언급해야 할 듯합니다. 영화 자체가 준비부터 촬영은 물론 결과물도 엉망진창이라 할 말이 참 많은 영화입니다.
고전 SF 소설의 귀재라고 할 수 있는 H. G. 웰스의 이 소설은 제법 기분 나쁘고 고민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소설을 찾으신다면 한 번쯤 읽어봐도 좋을 문제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