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발다치 <사선을 걷는 남자> 책 리뷰
1. 북미 범죄 소설의 재미가 가득한 소설
북미에서는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데이비드 발다치 형님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름도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기 힘든데 묘하게 국내에서는 듣보잡입니다. 시작부터 디스해서 미안한데, 중요한 건 제가 이 양반의 대표작인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 여섯권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챙겨 읽었다는 점입니다.
시리즈 첫 작품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를 2016년에 읽었으니 디테일한 설정은 전혀 기억이 안납니다만, 주인공 에이머스 데커는 2미터에 가까운 키에 100kg이 훌쩍 넘어가는 거구의 미식축구 선수 출신입니다. 덩치만 보면 몸빵하는 캐릭터 같지만 사고로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독특한 병에 걸려서 한번 본 건 모두 기억하는 인간이라 의외로 지능캐입니다. 어떻게 FBI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납니다만, 이 기억 능력을 살려 여러 사건을 해결합니다.
과잉기억증후군인 데커의 뇌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보니 문제가 있습니다. 소시오패스처럼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말을 막 한다는 의미죠. 먼치킨 능력을 장착시킨 만큼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디버프를 준 것이죠. 시리즈 초반에는 이 능력의 가감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을 관전하는 재미가 컸습니다.
그런데 시리즈가 6권까지 오다 보니 똑같이 모든 걸 다 기억하고 공감 능력은 제로인 상태로 지속하기는 지겨운 것이 인지상정, 그러다 보니 주인공의 기억에도 살짝 균열이 오기도 하고 사회성도 제법 길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발다치 형님이 모든 걸 다 기억한다는 이 개꿀 꽁먹는 주인공의 설정을 포기할리 만무하니 그냥 살짝 오락가락하는 수준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마무리됩니다. 뭔가 달라지고 발전한다는 모양새만 주고 꿀빠는 장점을 고대로 가져간다고나 할까. 그런 것이죠.
시작부터 잡설을 4단락이나 쓰는 제가 스스로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체적으로 정리하자면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는 북미 범죄 소설의 전형적인 재미가 한가득 넘치는 소설입니다. 주인공의 매력, 주변 인물들과의 적당한 긴장감 속에서 협력하는 텐션, 주로 작은 마을에서 시작하지만 미친 듯이 커지는 스케일과 음모 등이 대박입니다. 먼치킨 주인공이 뭔가 파격적인 행동을 하면서 도저히 풀 수 없을 것만 같은 사건을 결국 해결내는데서 묘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2. 사람 미치게 하는 고구마 전개와 긴장감 백만 배의 매력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의 특징은 주인공이 잭 리처만큼 크고 엄청난 힘을 가졌지만 딱히 싸움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 싸움을 잘하긴 하는데 그냥 하드웨어가 엄청나서 잘하는 수준입니다. 전문적인 살인 기술을 연마하거나 단련을 한 건 아니라는 점이죠. 동네에서 싸움 나면 빵으로 밀어붙이는 정도의 수준이랄까? 범죄자와 군인, 킬러들이 난무하는 세계에서는 덩치 큰 아기나 마찬가지입니다.
데커는 그냥 엄청난 기억력을 바탕으로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인간입니다. 이 캐릭터적 특징 때문에 나름 한가락 하는 하드웨어를 보유하고도 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을 겪게 되고 주변 인물들의 도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곤 합니다. 한심한 놈... 은 아니고 이런 상황이 너무 극적이기도 하고 우연이 남발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발다치 형님 소설 쉽게 쓰네.. 싶은 장면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나저나 시리즈 6번째 <사선을 걷는 남자>가 어떤지가 중요할 텐데, 제가 이 시리즈의 팬이라 그런 게 아니라 이 소설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발다치 형님이 같은 주인공으로 벌써 6권째 소설을 쓰고 있는데 얼마나 스스로 전작들과 비교를 하면서 썼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스케일도 커지고 이야기도 더 복잡해집니다. 이전보다 더 풀기 어려운 미궁 같은 문제들을 데커에게 던지고 위협도 하고 이리저리 엄청 굴리면서 근근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몰아붙입니다.
도대체 뭔 이야기인지 답답하고 미치겠지만 긴장되고 호기심은 계속 생기는 그런 지경으로 중반 이상을 끌고 나갑니다. 마, 읽다 보면 도대체 누가 죽인 건지, 왜 죽인 건지 미쳐 버립니다. 그 와중에 하나 둘 계속 더 죽어나갑니다. 참, 제가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절반 정도 읽고 반납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남양주 온 도서관에 이 책이 다 대출 중이고 예약도 걸려 있어서 참다 참다 이북으로 사서 읽었습니다. 중간에 끊고 말기에는 너무 궁금했던 것이죠. 그만큼 이야기를 이어가는 힘은 충분했고 더 읽고 싶도록 만드는 소설입니다.
3. 범죄 도시도 4편인데, 벌써 6편...
아무리 좋아하고 재미있어하는 소설이라도 6권째가 되니 패턴이 읽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재미가 없었냐하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마냥 훌륭하다고 칭찬만 하기에는 걸리는 것들이 좀 있습니다. 우리는 까칠하니까.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씨...
통상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소소해 보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에이머스 데커와 관련이 있거나 이 양반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거나 해서 풀어헤치다 보니 와따사와 일이 졸라 커.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었네? 그러거나 말거나 데커는 그냥 난 범인만 찾으면 될 뿐. 하며 계속 캐다 보니 하이고야 국제적 범죄를 막아버렸네? 이런 느낌이 이 소설의 기본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사선을 걷는 남자>는 패턴 자체는 같은데 약간의 변화를 줍니다. <사선을 걷는 남자>의 줄거리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단 이제는 FBI 요원의 자격으로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단순 사건을 풀기 위해 깡시골로 파견됩니다. 살인 사건을 조사하다 보니 이게 답이 안 나옵니다. 계속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중반을 넘어서까지 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뭔가 한 꺼풀이 벗겨지는데, 이게 또 사실은 알고 보니 처음 살인 사건과는 거 뭐 크게 관련은 없어. 그냥 얻어걸렸다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와~~ 해결했다~~'하고 보니 큰일이기는 한데 애초에 풀려고 했던 사건은 아니고 딴 게 걸렸어. 그래서 그건 그거고 또 스토리가 흘러갑니다.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깜짝 놀랄 반전들과 함께 거대한 음모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 음모와는 또 달리 처음 살인 사건의 범인은 전혀 다른 곳에서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모든 전말이 밝혀지고 시골 마을에는 평화와 미래를 향한 희망만 남습니다. 이게 <사선을 걷는 남자>의 전체적인 줄거리입니다.
발다치 형님이 반복되는 패턴과 전작을 의식해서 그래도 최신작인데 전작들보다 더 나아야 하지 않겠냐는 강박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맛있는 빵을 3중 포장해 놓았는데, 아무리 맛있어도 포장이 너무 과하다 보니 풀다가 짜증이 좀 나는... 그러니까 '아놔, 왜 굳이 이렇게까지 꽁꽁 포장할 필요는 없잖아?'라는 느낌으로 살짝 스트레스를 받는 느낌입니다. 너무 복잡하게 꼬아놔서 후반부에 사건이 풀려나갈 때 '와, 대박!'이라는 느낌보다는 '흐음.. 크흐으음....' 같은 느낌을 받는달까? 설명 졸라 고오급스럽다...
여튼 지나치게 복잡하게 스토리를 짜고, 주인공들은 헤매고 독자는 정신없고, 좀 그런 느낌입니다. 그 와중에 더 짜증 나는 건 이걸 읽는 과정이 재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냥 욕도 못 하겠어. 아니 욕하면서 계속 읽는 그런 느낌... 이 와중에 데커는 계속 매력적이고 머리 쓰는 FBI 소속 데커와 재미슨 커플, 무력 킹왕짱 CIA 소속 로비와 릴 이렇게 네 명의 조합이 훌륭합니다. 완벽한 파티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이대로 소설을 끝내버리기는 너무 아까운 완성형의 상황. 조만간 또 신간이 나오면 욕하면서 읽을 것 같은 그런 시리즈였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