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바람 난 노 교수는 왜 리스본으로 떠났을까?

파스칼 메르시어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책 리뷰

by 돈다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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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삶의 결정적인 순간...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정체성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누군가는 은근하게 평생을 고민하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갑자기 현타가 오기도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인간은 왜 태어나 고생하며 사는가?' 뭐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누군가는 일찌감치 고민 속에 방황하다가 인고의 과정을 거쳐 안정된 삶을 살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순응적인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훌쩍 낯선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요는 그 타이밍이 언제인가의 문제입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나이 지긋한 노 교수의 늦바람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톱니바퀴처럼 규칙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딱히 자신의 삶에 대한 방황을 한 흔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 늙어서 말입니다. 갑자기 묘령의 여인을 마주하고 판타지 같은 순간을 겪으면서 안정적인 삶을 훌쩍 떠나가 됩니다. 여인으로 인해 흔들린 일상이 이끈 헌책방에서 만난 책 <언어의 연금술사>는 그레고리우스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결정적 장면이자 트리거가 됩니다.


노 교수가 묘령의 여인을 만나 일탈을 한다는 설정이라면 자연스레 "사랑에 나이가 문제냐?"로 귀결되면서 장년을 위한 로맨스 소설로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기대를 하면서도 식상한 마음이 동시에 들게 되었을 겁니다. 옛날 통속 소설을 읽게 되나 보다 싶은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뿐 아니라 히브리어에도 조예가 깊어 구약학 교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진짜 학자인 언어학 교수입니다. 이런 노 교수가 여인의 향기에 취한 것이 아니라 그 여인으로 인해 만난 포르투갈어에 맛이 갔던 것입니다.


일상을 이어갈 수 없을 만큼 머리를 때리는 "포르투게스", 이는 교수로서의 삶을 상징하는 교재를 넣고 다니는 책을 교탁에 버려두고 일상을 훌쩍 벗어나게 만듭니다. 그렇게 교단과 학교를 떠나며 "그는 57년이 지나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이제 완전히 장악하려고 한다는, 불안과 해방감이 섞인 기묘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전 부인이 쓰던 언어인데도 무시하던 포르투갈어 때문에 훌쩍 일상을 떠날 줄은 자신도 전혀 몰랐겠지요. 에스파냐 책방에서 만난 책에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문구를 접하고 2차 대충격이 찾아옵니다. 그렇게 그는 그 책을 사고 그 책의 저자는 누구일까?라는 강렬한 호기심에 휩싸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의 극 초반에서 서술하는 것처럼 우리가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되는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을 하는 순간은 의외로 단순하거나 하찮기까지 합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그때가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반추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소설에서도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시작부터 독자들에게 자기 인생 여정의 결정적인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슬그머니 찾아온 그 순간을 마주하면 해방감보다는 불안을 크게 느끼고 그 자리에 눌러 앉습니다. 훌쩍 떠나는 일은 상상에 그치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일상을 과감히 벗어난 소설 속 노 교수의 행동에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는 쉬이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니까, 소설은 그래도 되니까. 안전한 간접 일탈이 허용되는 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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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아 나서는 여정...

일상을 떠나 리스본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는 잘 움직이지 않는 노쇠한 몸뚱이를 이끌고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인 프라두의 삶의 여정을 찾아 나섭니다. 프라두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그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그와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도 관여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과 인물과 사건을 겪으며 지적 탐구를 이어갑니다. 이 과정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새로운 지적 탐구에 탐닉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익숙했던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으로 갈등하는 모습을 세심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우스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변하게 극적 과정은 안경으로 상징됩니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두껍고 무거운 안경이 지나가던 사람과의 접촉 사고로 떨어지고 자기가 밟아서 부러뜨립니다. 리스본에서 새로운 안경을 만들면서 그는 별것 아닌 안경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무거운 안경을 코에 걸치고 있던 지금까지의 삶을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기분"을 느낍니다. 무시무시한 오바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새로 맞춘 가볍고 빨간 테의 안경을 쓴 순간 그의 시야에는 새로운 세상이 들어오게 됩니다. 몇 번의 부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착한 새 안경으로 바라본 세상은 신세계였고, 나중에 다시 오래된 안경을 써보고는 두 번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레고리우스가 리스본에서 프라두의 인생을 뒤쫓으며 탐닉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일과 그의 경험도 새로운 안경을 쓰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프라두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깨달음을 위한 여정을 하는 동안 비단 그레고리우스만 삶이 변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프라두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과거에 붙들려 있던 주변 인물들도 그레고리우스의 등장으로 인해 과거를 돌아보고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일종의 Win-Win입니다.


이 소설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자신의 내면을 향해 떠나는 일종의 여행과 같은 소설입니다. 저자는 그레고리우스의 이야기에 프라두의 이야기를 짜넣어 액자소설로 구성함으로써 포르투갈 독재 정권 시대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적절한 거리 두기를 하고 있습니다. 액자 속 이야기가 상당히 심각하고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점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단순 서사가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의 여정에 의해 엄혹했던 과거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기술적으로 훌륭합니다.


서사 구조만 놓고 보면 그레고리우스가 리스본이라는 신세계로 떠나 모험하고 성장해 돌아오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성공하는 이야기인 영웅 서사라는 점도 빠질 수 없는 부분입니다. 조지프 캠벨의 영웅 서사 구조와 완전히 매치 시키기는 어렵지만 현실적이고 세련되게 구성한 영웅 서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화의 시대 영웅 서사를 대표하는 오디세이아와 역사의 시대, 현대를 대표하는 그레고리우스의 여정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이뿐 아니라 소설 속에는 여러 인물과 얽힌 이야기까지 리뷰에 다 담기 힘든 많은 착안점들이 있고,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네버엔딩 이야기보따리로 빠져들게 만드는 철학적인 요소가 가득한 소설입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인생 소설로 뽑는 분들도 많고, 이 소설을 나노 단위로 쪼개고 분석해 연구하는 덕후들도 많습니다.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독자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고 삶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도 의미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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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읽고 쓰는 인간, 자기 인식과 성찰의 과정...

메르시어 작품의 주인공들은 거의 다 '언어'와 관련이 있는 직업인 것 같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역시 중요한 두 인물이 고전어 교사와 작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머지 인물도 대부분 하나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어에 소질이 없는 저로서는 드럽게 부러운 부분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여 존재를 구성할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레고리우스야말로 자신의 세계를 언어로 구축한 대표적 인물의 표상입니다. 그는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으로 구축한 자신만의 완성된 소우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 때문에 그의 별명이 바로 문두스(Mundus)입니다. 이는 라틴어로 "세계"를 뜻한다고 합니다. 결국 주인공이 익숙한 세계를 떠나 리스본을 탐험하는 것은 이미 구축해 둔 자신만의 문두스로부터 낯설고 새로운 문두스로 향한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철옹성 같던 문두스를 뒤흔든 한마디는 바로 "포르투게스(포르투갈어)"였습니다. 즉 그레고리우스의 새로운 문두스는 바로 포르투갈 언어였던 것이지요. 그는 여인의 대답 한 마디를 듣고 "'오'는 '우'처럼 들렸고, 올리면서 기묘하게 누른 '에'는 밝은 소리를 냈다. (중략) 하루 종일이라도 듣고 싶은 소리였다"라며 언어학자 다운 반응을 합니다.

이 한 단어에서 시작된 낯선 울림은 한순간의 일탈에서 그치지 않고 일상 언어로 쓰인 책을 읽는 일로 발전합니다. 이는 저자인 프라두를 찾아 나서는 여정과 동시에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고 습득하는 과정이 병행됩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낯선 세계로 진입하는 것과 같으며 리스본에서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또 다른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의 삶과 인생에 호기심을 강하게 느껴 찾아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의 삶과 언어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자기 인식의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언어철학에 천착한 저자 메르시어(페터 비에리)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나아가 타인을 이해하며 더 나아가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된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의 큰 목적 중 하나는 타인이 쓴 이야기를 이해하는 여정에서 그의 삶을 간접 체험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읽기 뿐 아니라 쓰기도 유사한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데 저자는 그레고리우스를 통해 읽기의 힘을, 프라두를 통해 쓰기의 효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글을 읽고 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내적 변화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찰한 일종의 보고서와 같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제처럼 인식의 세계가 넓어질수록 자유의 범위가 증가하는 것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계속 읽고 쓰고 싶습니다. 아직도 읽기에 비중이 극단적으로 넓지만 계속 읽고 쓰는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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