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덕후가 들려주는 책 읽기에 대한 다양한 단상들
몇달 전입니다. TV에서 책과 독서를 엄청 사랑하는 60대 남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이 분은 과거 말위에서 독서를 즐기던 것에 빗대어 지하철에서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국내 대형서점에서 열권 이상의, 그것도 영어원서를 구매하셔서 연간 1600여 권인가를 사신 분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그 나이에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데, 친구와 함께 자신의 집을 소개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참담한 마음이 들고 말았습니다. 집은 입구부터 옷가지며 쓰레기 넝마처럼 보이는 것들로 정신없이 어지럽혀있었고, 싱크대는 시커먼 그을음과 묵은 때로 청소가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쌀이 썩어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상당한 공력이 느껴지는 독서에 대한 이야기가 다양하게 담긴 이 책 "읽기의 말들"에서 저자는 이덕무 선생과 톨스토이의 글을 인용해 독서와 생활의 조화에 대해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덕무가 [사소설]에서 "사람이 독서하는 틈을 이용해 울타리를 매고 담을 쌓거나 마당을 쓸고 변소를 치우거나 말을 먹이고 물꼬를 보며 방아 찧는 일을 한다면 몸과 체력이 단단해지고 뜻과 생각이 평안해져 안정을 찾을 수 있다"라고 경험담을 나눈다. 이에 톨스토이는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일상적 노동을 무시하고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라고 화답한다.
책이 너무 좋아서 보이는 족족 사 모으고, 정신없이 읽는 사람을 책을 좋아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시대에 떨어지는 특이한 사람으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건 적어도 기본적인 일상을 깔끔하고 균형적으로 유지해야 건강한 독서덕후라고 할 수 있지 않을지요. 연간 1600권이나 사들였는데 그중에 일상의 중요성을 설파하거나 미니멀리즘, 중용 등에 대해 소개한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단 말입니까? 없었다면 책을 고르는 기준에 문제가 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열심히 책을 읽는 행위를 사랑하기는 하되, 책에 담긴 내용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겠지요.
저는 뭐든 적당주의가 판치는 세상의 세례를 받아서인지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무엇인가에 몰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신 꾸준히 설렁설렁 유도리넘치게 하는 것은 몇몇 있습니다. 누구라도 에너지를 쏟아서 무언가를 꾸준히 오래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무언가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쏟는 행위를 꾸준히 한다면 정말 좋아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면에서 저자는 적어도 저보다는 책 사랑, 독서 중독에서 비교도 안될 만큼 훨씬 윗길인 것 같습니다. 살짝 징글징글하다는 생각도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애정과 사랑 때문에 이 책 전반에 드러나는 것처럼 책에 대해, 독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슬쩍 훔쳐보는 입장에서도 보기 좋은 일입니다. 그리하여, 뭔가 흐뭇한 느낌으로 이 책을 끝까지 읽은 것 같습니다.
늘 그렇듯이 책 내용의 어떠함 보다 저자가 어떤 사람이고, 어쩌다가 이런 책까지 쓰게 되었는가를 상상하면서 읽다 보니 흥미롭고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분이어서 그런지 역시나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기도 합니다. 유유 출판사는 저자 컨택을 잘 하는구나 싶습니다.
대체로 저자가 보여주는 독서에 대한 입장은 잘 고른 책을 정독, 숙독, 재독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마간산으로 후루룩 읽어재끼는 형태의 독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긴 글을 읽기 힘들어하는 시대에 독서에 필요한 태도는 오히려 천천히 깊이 소화하듯 책을 읽어서 그중 일부라도 자신의 것으로 채화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권해줍니다.
한편, 제대로 된 독서가들이 대체로 지적하듯이 책 읽기로 성공을 거둔다거나 부자가 된다거나 인생을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지적하고 있고, 진정한 독서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기는 '잉여의 책 읽기'가 독서의 최고봉이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무척 잘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서의 순간순간이 공부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잉여시간을 어떻게 즐기는가?'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한편 저자는 독서를 통해 자신의 삶 자체보다는 태도를 바꾸고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독서는 삶을 바꿔 주지는 않지만 더 근사한 것을 준다.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독서가 야속하고도 고마운 이유다. 책은 확실히 삶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
불안과 공포로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저 앞만 보고 달리도록 내몰고 있는 우리 사회 속에서 잠시 치열함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독서의 가장 큰 효용이 아닐까 합니다. 적어도 이 책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라면 책과 독서에 대해 애정이 깊은 사람일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체로 글의 내용에 동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내용을 빌어 우리에게 '도대체 어떤 독자와 사서가 될 것인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뜬금없지만 지나가면 그뿐이고 후회를 잘 하지 않는 제 인생에서 유일한 후회 중 하나가 진작부터 책을 읽지 않은 것인데, 이미 많은 시간을 소진해버리고 나니 읽고 싶은 재미진 책들이 널리고 널린 세상에 마르고 닳도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책들의 도서관인 온 우주를 섭렵하고 싶습니다. 책이 나이고 내가 책인 아트만을 깨달아 해탈에 이르고 싶습니다. 그 쯤되면 책 읽는 시간의 부족 정도는 어떻게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더 나가면 헛소리가 대폭발할 것 같아서 이만 줄이고...
대체로 저자의 생각과 관점에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책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저자의 통찰과 고백은 저에게도 약간의 두근거림과 설렘을 전해 주었습니다. 책과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대놓고 쓴 책을 싫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임은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