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그곳에 있다.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by Rumina

전시된 껍데기들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왔다가 걸어 나간 두 남녀의 모습이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키 큰’ 외엔 아무 수식어도 붙지 않은 그들의 모습이 한없이 가볍고 자유롭게 느껴졌다.
걸음마저 너무나 가볍게 느껴져 그들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도 여겨진다.
온갖 수식어와 스토리를 벗어버리고 그들은 이제 ‘키 큰’이라는

하나의 가느다란 언어로만 이 사연 많은 세상에 묶여 있는 것 같다.


언젠가부터 올라와 있던

맥락 없이 사고할 수 있는가,

과거 없이 현실을 살 수 있는가의 은근한 의문은 어떤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이미지로 답을 찾았다.


나는 요새 스토리에 신물이 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뭔지도 모를 감정으로 오래 끌어안고 있던 무엇들을 언어로 마주하는 일을

한강의 소설들이 해주는 것 같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날 것의 무엇들.
예를 들어 ‘어둠의 사육제’에서의 “지린 오줌이 차갑게 식어가며” 같은 환멸스러운,

그러나 너무나 친숙한 무엇들이 역시 뭔지도 모를 깊은 무엇들을 쑤셔 댄다.

아마도 이것이 몸에서 떼어낸 석고 조각을 보는 일인 것 같다.


원형은 왜 그토록 껍데기에 집착하는가

그는 L과 E를 통해 마침내 어머니를 구원하였는가,

어머니를 구하고자 함은 결국 자신을 구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는가 등을 생각하였다.
주관적 고통과 객관적(?) 고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머리가 아팠다.

머리를 가슴으로 내리는 것도, 가슴의 무언가를 머리로 풀어내는 것도 너무 어렵고 피곤하다.


위조지폐의 감별법은 다양한 종류의 위조지폐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지폐 하나만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제 모든 스토리에서 떠나 '진짜'만을 추구하겠다 생각했다가는,
이 스토리들이 인간이 진정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유희이구나를 또 생각한다.
그러다 ‘진짜’를 본다는 것은

온몸을 발가벗겨 석고를 붓고,

굳히고, 화상을 입는 것 같은 열감을 견디고,

떼내는 고통을 이기고 어쩌고의 과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 이구나도 생각한다.


행여 ‘진짜’에 닿아 유영하듯 걷는다 해도, 껍데기는 그곳에 있다.
그것은 마치 부활한 예수의 몸에 남아있는 ‘성흔’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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