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우 우웅!’ 마지막 광안대교 야경 유람선을 놓쳤다. 2층에는 흰색 차양이 펼쳐져 있고 노란색 의자에 몸체에 빨간색 띠를 두른 낭만적인 배였다. 붉은 노을과 푸른 밤이 교차하며 해운대 달맞이길이 한결 화려해지는 중이었다. 부산에 대한 또 다른 아쉬움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고운 머릿결을 흩날리며 나를 반겼던
그 부산역 앞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어디로 가야 하나 너도 이제 없는데'
타고 온 SRT에서 내려 부산역 광장에 서자 나도 모르게 이 노래부터 흥얼거렸다. 쓸쓸함이 가슴을 깊숙이 찌르는 최백호의 음성 때문일까. 옛사랑이 떠올랐다. 정작 그와는 부산에 와 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아있는 걸까. 노랫말대로 부산은 참 많이 변했다. 출구를 찾는데도 한참을 헤맸으니. 부산역사는 공항 대기실을 방불케 할 만큼 사람이 북적거렸고 넓었다.
부산역 맞은편으로 건너가 밀면을 먹었다. 한국 전쟁 당시 북쪽에서 피난 온 이들이 생계를 위해 만든 애환의 음식이라고 한다. 물냉면과 비슷한데 호로록 술술 넘어가는 밀가루 섞인 면에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밀면을 먹으니 부산에 온 실감이 났다.
부산은 어느 계절에 와도 좋다. 이른 아침에 활처럼 둥근 해안선을 따라 모래사장을 강아지와 달리는 사람이나 정박장에 세워둔 요트마저 풍경이 되는 곳이다. 왼쪽의 동백섬과 다른 한쪽의 달맞이 길이 바다를 보자기처럼 감싸 안아 겨울에도 바람이 아늑하다. 여름 해운대 바람은 실잠자리를 띄우고 있었고 잘 튀겨낸 감자칩처럼 바삭했다. 솜털 사이에 숨어 있던 습기를 손바닥으로 털어내며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파란 바다 옆 빨강 파라솔은 서로 대비되어 웃음소리처럼 명랑했다. 왼쪽 해안선 끝 달맞이 고개에 모여 있는 집들은 이탈리아 아말피 해변처럼 이국적으로 보였다. 파라솔 아래 선베드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 파라솔마다 앉은 외국인을 보니 우리가 이방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파라솔 아래 앉아있으면 바람이 수시로 다녀가며 따가운 햇빛을 밀어냈다.
어쩌다 어른끼리 바다에 가면 바다는 그저 멀리 바라보는 풍경으로 그쳤었다. 두 살이 된 손자와 함께 온 해변은 어른도 천진난만한 개구쟁이로 만들었다. 파도는 소금을 가득 담은 커다란 바구니를 숨기고 서서히 다가와서 하얀 소금을 왈칵 쏟고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파도의 짓궂은 장난에 신이 나서 짭짤한 물이 입안까지 튀어도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젖은 모래의 감촉을 손으로 느끼며 파도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휩쓸리며 놀았다. 물이 빠르게 빠질 때 과장된 표정으로 넘어지는 척 “에구구” 소리를 내니 손자는 까르르 웃었다. 아이 하나가 어른 넷을 즐겁게 했다. 아니, 어른 넷이 신이 나서 아이한테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파라솔은 바람개비처럼 신나게 펄럭였다.
물놀이가 끝나면 해변에 마련된 수돗가에서 모래 묻은 팔다리를 물로 씻고 에어건으로 한번 더 털어내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래도 옷을 벗으면 호주머니마다 모래가 숨어있었고 숙소 바닥이며 심지어 침대 속에도 모래가 서걱거렸다. 다음날도 해변을 다녀오면 여지없이 모래가 따라오는 일상이었다. 단순한 일들이 지루하지 않았다.
저녁이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해변을 걷자고 식구들을 졸랐다. 테이블을 밖에 내놓고 음악을 크게 틀은 바 앞을 지날 때면 대나무를 엮어 만든 둥근 갓에 노란 불이 들어와 있었다. 자리마다 맥주를 마시는 외국인까지 더해져 마치 동남아의 어느 해변을 걷는 느낌이었다. 음악을 따라 발걸음도 둠칫둠칫 저절로 흔들리며 걸었다.
코로나와 겹친 남편의 은퇴, 딸의 조산, 어머니의 건강 문제까지, 집안에 닥친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댔다. 현실적인 고민으로 깊이 잠들지 못한 날도 있었다. 한 5년쯤 어딘가에 몸을 숨긴 채 정성스럽게 글을 쓰고 싶다는 안톤 체호프의 말처럼 무작정 떠나고 싶은 날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가족이 곁에 있어 힘을 냈다. 수평선 멀리 갔다가 육지로 되돌아오는 파도처럼, 집으로 향하게 하는 힘은 결국 가족이다. 기쁜 일이 생겨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떠올리는 건 항상 가족이다. 단단한 매듭처럼 촘촘히 엮인 가족이 서로에게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바닷물과 모래가 겹치는 자리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삶의 경계선 같다. 슬픔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기쁨의 밀물이 돌아온다고, 생에는 항상 기쁜 일만 있는 것도 슬픈 일만 계속되는 것도 아니라고 바다가 일러주었다. 모래 위 지나온 발자국을 파도가 지우고 우리는 나란히 새 발자국을 만들며 걸었다.
사는 동안 ‘부산에 가면’ 노래를 저 혼자 흥얼거리는 날도 가끔 오겠지. 부산은 못 이룬 사랑을 떠올리는 그리움의 장소로 남아있겠지. 이제는 볼 수 없는 옛사랑 대신 사랑하는 가족과 걷는 해변이 머리 모양에 길든 베개처럼 편안했다. 놓쳐서 아쉬운 유람선을 뒤로하고 지금 손잡은 우리는 서로 다정할 수밖에.
“마 내 부산사람 아인교. 마이 주소!” “부산사투리 하지 마라! 티 다 난대이.” 광어회를 사러 가서 어설픈 말투로 부산 사투리를 흉내 냈다. 달맞이길 회센터 횟집 아주머니의 면박을 들어도 숭늉처럼 구수한 말투에 기분이 좋았다. 가족과 여행 중에는 웃음소리도 평소보다 커지고, 장난도 농담도 유쾌하게 느껴졌다.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긴 해운대 해변을 따라 포장한 횟감을 들고 숙소를 향해 갔다. “‘아이가 잠들면 어른들은 광어회에 달콤한 화이트와인을 마시자. 내일의 부산 여행을 소곤소곤 의논해야지.” 그러면서 걸었다. 하늘빛이 온통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온종일 뜨거웠던 시뻘건 해가 쇳물에 담가져 지지직 소리를 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