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강

여행에세이

by 지유



술기운이었을까? 따뜻한 아랫목의 온기 탓에 마음마저 풀어졌기 때문이었나? 그 밤 홍천강 가의 민박집에서 그가 털어놓던 이야기가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그날은 작은 모임에서 다섯 명이 홍천으로 일박 이일 여행을 간 날이었다. 낮에 수타사를 걷고 돌아와 강가에 세워둔 야외 천막에서 숯불을 피우고, 두툼한 삼겹살까지 구워 먹고 난 후였다. 어둠이 강의 비늘을 모두 덮은 밤,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자며 자리를 옮겼다. 작은 탁자에 옹기종기 모여 술잔을 기울이다, 마치 소설 같이 시작된 그의 이야기에 일행은 숨을 죽였다. 나이 육십을 넘긴 한 남자의 어깨너머로 한 소년이 걸어 나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들을 낳고도 호적에 오르지 못한 어머니와 그 아들은, 정작 남편이자 아버지가 세상을 떠도 상주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배다른 어머니가 낳은 동생이 상주로 서 있는 장례식장에서 단순한 조문객처럼 조문을 올리고 돌아서야 했던 밤이었단다. 그 후로도 시장통에서 홀로 장사를 하며 모질게 아들을 키웠을 그의 어머니와 그가 얼마나 서로 의지했을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다만, 바닷가의 바위벽에 붙은 따개비처럼 생계를 책임지도록 밀어댄 어머니의 손아래 형제들과, 혈육도 외면한 채 상속의 문제 등 후일을 걱정한 그의 배다른 동생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도 제삼자를 미워할 수 경험이었다.


“초등학교 육 학년 즈음이었나, 용산역에서 혼자 기차를 타고 갈 때면 무섭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어요.” 어릴 적 그는 방학을 이용해 다음 학기 육성회비며 용돈을 타러 아버지에게 갔었단다. 완행열차의 창문에 매달려 보던 초록빛의 남쪽 평야가 기억난다고 했다. “기차역에 내리면 아버지가 마중 나와 있었어요. 나한테는 어렵고도 반가운 아버지였지요.”


아버지가 모는 자전거의 뒤에 타고 논둑길을 지날 때, 잠깐 그 순간이 행복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이른 저녁으로 국밥 한 그릇을 사주고는 아버지가 가정으로 돌아가면, 그는 허름한 여관방에서 홀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혼자 재운 아버지에게서 학비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멀고 헛헛했을까.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들과 아버지의 끈을 이어주려 굳이 어린 소년을 혼자 기차에 태워 보냈으리라 짐작했다.


그와 그 홀어머니의 생애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듣는 일은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의 생애가 하나의 실루엣으로 겹치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에 그가 풀어놓은 비밀을 듣던 나의 가슴께에 묵직한 돌덩어리 하나가 얹혔다. 여름날 오이지 담글 때 눌러놓은 넓적한 돌처럼, 지긋하고도 서글픈 버캐가 시간처럼 쌓이고 있었다. 그가 왜 지극한 효자가 되었는지,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따로 집에서 나와 구십이 넘은 어머니의 식사를 챙기며 함께 지내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모임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 맞는 이들끼리 만나 전시를 보거나, 산책하거나, 사진을 찍으며 소소한 추억을 쌓는 모임이었다. 그날 어떻게 해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됐는지, 무슨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고 본인 또한 그렇다고 했다. 여행이 건네는 마법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그날의 풍경과 분위기가 마음속에 꼭꼭 숨겨둔 오래된 이야기를 풀어놓게 하는 힘. 이 사람들이라면 색안경이나 편견 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리라는 믿음 같은 것. 그저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는 잘 여며 각자의 서랍 속에 넣어 두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그의 등을 토닥이며 참 잘 살아왔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앞으로도 늘 응원할 거라고 속으로 되뇌었었다.



내게는 내 몫의 슬픔과 비밀이, 나 아닌 다른 이에게는 그만큼의 슬픔과 비밀이 있을 것이다. 다른 이와 여행을 함께하다 보면 무장 해제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툭 털어놓는 순간이 있다. 그저 혼자 담아두기에는 억울하거나 무거웠던 이야기가, 여행을 통해 비워지고 새로운 기운을 채우기도 한다. 그 덕분에 우리 생이 깊어지면서 살아갈 힘을 얻는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서는 위로를 받기도 하고 오래 묵은 상처가 치유되기도 한다. 그 밤 어둑어둑한 홍천강에 흐르던 한 남자의 비밀은, 바다에 가서 몸을 풀었을 것이다.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을 이야기가 푸른 산호초처럼 바다 깊은 곳에서 반짝일 거라고 나는 믿었다. 남은 그의 생이 내내 반짝이기를 소원할 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