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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Im Jun 09. 2021

남해에서 찾은 푸껫

생각해보면 나도 시골 촌아이였던 날들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99년도 말 21세기로 넘어가는 문턱에 태국 푸껫으로 이사했다. 당시 아빠가 나와 동생을 꼬시고자(?) 했던 멘트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태국 (국제) 학교에선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골프 치고 승마 배운대. 멋있지?" 당시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내가 뭘 알았을까... 아빠가 보여준 그림 같은 사진들에 아무 생각 없이 오케이를 외쳤다. 사실 내가 싫다고 했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을 테지만.




수도인 방콕도 아니고 태국 남단의 작은 섬 푸껫. 영국 국제학교를 보내준다던 아빠는 마음이 바뀌어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푸껫에서도 제일 후진! 로컬학교에 나와 동생을 넣었다. 영어만 해서는 한계가 있고 현지 언어를 할 줄 알아야 완전히 그 사회에 녹아들 수 있다며.


비가 오는 날은 천장에서 뚝뚝 물이 새서 대강당으로 책걸상을 들고 대피했고, 정말 순수했던 시골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서로 머리에서 이를 잡아주느라 바빴으며, '낀쩨'라는 태국의 채식 기간에는 신들린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할 방언을 하다 학교 측에서 마련한 종교의식이 끝난 후 쓰러졌다.  분당 신도시 넓은 아파트에서만 자란 차도녀(?) 눈엔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세상에 이런 일이? 였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경악할 일들이 가득했다.


지금이야 푸껫도 인프라가 많이 좋아졌지만 99년도만 해도 택시도 없고 가로등이 모자라 해가지면 깜깜했고, 백화점도 태국 전역에 퍼져있는 쎈딴 (Central, 쎈트럴) 이 들어오기 전이라 빅씨 마트와 작은 로빈싼 (Robinson, 로빈슨) 백화점을 주야장천 갔었고, 작은 시내에 하나밖에 없는 볼링장에서 가족끼리 내기 시합을 했던 기억이 난다.




몇 달 채 되지 않아 한국 도시 깍쟁이는 그야말로 현지화가 완벽히 거쳐 누가 봐도 푸껫 촌아이가 되었다.


하교 후에는 세 살 어린 남동생과 사촌 여동생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볐다. 매일 같이 단지 내 야외 수영장에서 살았던지라, 셋다 물안경 쓴 부분만 남겨두고 새까맣게 구워져 버려 판다가 따로 없었다. 


길거리에서 무삥 (돼지고기 꼬치)와 찹쌀밥을 사 먹고, 비닐봉지에 담아준 차놈옌 (태국식 밀크티)을 자전거 손잡이에 매달아 달랑거리며 빌라 단지를 돌아다녔다. 유독 더운 날에는 반바지와 쪼리 차림으로 동네 언니 오토바이 뒤에 착! 걸터앉아 시장으로 달려가서 휘황찬란한 인공색소가 잔뜩 뿌려진 얼음 빙수를 먹었다.


주말이면 엄빠와 (먼저 태국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삼촌네 가족, 사촌 오빠 내외와 다 함께 바다에 갔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던 햇볕, 시원한 바람에 섞여 오는 짠내, 발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고운 백사장 모래알, 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섞여 웅성거리며 내는 알아듣지 못하는 다양한 외국어들, 열대지방에 어울리는 알록달록한 옷들...




정말 기막히게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남해에서 푸껫을 보았다. 조용한 동네와, 아직까지 인심이 남아있는 순박하고 욕심 없는 동네 사람들과,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과 시원하지만 습한 바다 냄새가 섞여있는 거센 바람까지. 어릴 적 푸껫과 똑 닮아 있었다. 


그리고 동생과 매번 얘기하던 게 떠올랐다. 지금까지 제일 행복했던 시간을 꼽으라면 단연코 푸껫에서 보낸 1~2년 남짓한 그 시간이라는 것. 그때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매일매일 잘 자고 잘 먹고 학교에 가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태국어로 수업을 듣고 온 힘을 다해 헤엄을 치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되었다. 더도 말고 그거면 되었다. 


어릴 적 추억은 너무나 그 힘이 커서, 나도 만약 아이를 가진다면 중학교까지는 공부 압박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우리 엄빠가 나를 위해 했던 것처럼 운동, 미술, 음악, 외국어를 가르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를 만들어주고, 자연에서 스트레스 없이 가족끼리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그저 7월에 새로운 회계연도가 시작되면 다시 정신없이 바빠질 테니 한숨 돌리자고 내려온 남해에서 잊고 지내던 어릴 적 추억까지 떠올리게 될 줄이야. 여러 나라와 도시에서 열심히 커리어를 쌓고 일하다가 은퇴 후에는 제2의 고향인 동남아에서 설렁설렁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는데 이번에 남해에서 한 달을 지내보니 그게 국내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워낙 파란만장 버라이어티 한 삶인지라 앞으로 호주에서 일하다 터를 잡게 될지 아니면 또 제3의 나라로 갈지 한국으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미친 듯 숨 가쁘게 살며 위로 올라가기만 갈망하던 20대의 나를 지나 조금은 여유를 갖게 된 30대의 나를 남해에서 한 번 더 돌아본다. 




과거, 현재, 미래...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각각의 점들이 희한하게 이어지는 날이 또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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