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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Im Jul 21. 2020

꼬리표 #2. 젊은 여성

내게 '유교걸'을 바라지 마세요



하..... 난 다음 생엔 무조건 남자로 태어날 거야.
동양 여자, 그것도 한국에서 유교걸 코스프레하는 건 정말 힘들어서 못해먹겠다  



       난 점보는 걸 좋아한다. 힘들 때마다 찾아가는 고정 점집도 있다. 첫 직장에서 동기 언니들이 여기가 그렇게 용하대~라는 말에 귀가 코끼리 덤보처럼 팔랑팔랑 해서 처음 신점을 보러 갔다. 그 뒤로 맛들려서 여기저기 참 많이도 보러 다녔다. 어릴 땐 나는 어떤 인간이고 앞으로 내 인생은 대체 어떻게 풀리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러 다녔다면, 이젠 답은 이미 알고 있지만 힘들 때 속풀이 하러 한 번씩 간다.


        갑자기 시작부터 웬 점집 타령이냐고? 신점이나 사주를 보면 모두가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아이고~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이 집은 딸내미랑 아들내미가 바뀌었네! 지금 이사주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진짜 크게 한자리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까워라~'.  처음엔 그저 단순히 내가 외향적이고 겉으로 보기에 시원시원해 보이니 그런 말 하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들이 득실득실한 IT업계에서 일을 하면 할수록 난 왜 여자로 태어난 거야!?!?!? 라며 내 생물학적인 성별을 개탄스러워하게 되었다.


           꼬꼬마 사원 시절에는 마케팅 일을 하다 보니 여자들도 많아서 그다지 차별을 느낄 만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세일즈로 전향하여 이직한 뒤로는 점점 남자들과 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40~50대의 이사, 상무, 대표님들. 다행히 죽이 잘 맞아서 사적으로도 허물없이 지내는 선배님들이 많고 이 연령의 아재들을 많이 좋아한다. (아재는 내가 이분들이 귀엽다고 생각해서 쓰는 애정이 담긴 단어다. 오해 마시길.) 오픈마인드의 좋은 남자분들을 많이 만났지만 이 글은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글인 만큼, 내가 겪었던 무례했던 케이스들만 나열해 본다.




'겨우 스물여섯 짜리 여자애가 과장? 쟤 어떻게 들어왔대? 낙하산 아냐?' '서른 살짜리가 차장? 쟤 뒤에 백 있는 거 아니야?' '서른셋에 부장? 그게 가능하기나 한 거야? 그냥 명함에 쓸 대외용 타이틀이겠지. 외국계에선 한국 직급 아무 의미 없잖아.' '그냥 우리 식대로 우선 처리하고 나중에 구슬려서 컨펌받아.' '고객 접대 자리는 웬만하면 파트너들에게 넘겨.'


       내가 다닌 회사 중 한 상무님이 초면에 내게 한 첫마디가 이제와 생각하면 참 어이없다.

'외국임원들이 다 써니에 대해서 극찬을 해서 나도 기대가 커. 앞으로 잘해봅시다. 그런데 나이도 어린데 직급이 높아서 어쩌지. 써니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죄다 대리, 과장급인데.'

'상무님 너무 걱정 마세요. 세일즈라 대외용 타이틀로 주셨다고 하면 되고, 저도 예의 어긋나지 않게 선배님들께 많이 배울게요.'라고 얘기했고 트러블 없이 다른 직원들과 잘만 지냈다.


        그런데 같이 식사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한 마디씩 툭툭 던지신다. 나이 많은 유부남 남자 대리, 과장들 다 힘들게 일하는데 대우 잘 못 받는다, 네가 잘해야 한다, 기분 상하지 않게 해라. 어쩌고 저쩌고. 몇 번이나 나이, 직급, 성별 얘기가 나오길래 짜증 나서 대놓고

'상무님~ 제가 다른 분들한테 혹시 실수한 게 있나요? 기분 상하신 게 있대요? 그럼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제가 더 조심하고 고쳐야 하니까요.' 이랬더니 당황하시며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여기 오래 있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 듣는데.. 저 사람들이 자격지심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고 승진 얘기하다 보면 써니가 언급이 될 수밖에 없지~' 하며 얼버무리시는 게 아닌가.


        내가 남자였다면 나이와 직급으로 이런 말을 들을 일이 과연 있을까? 속으로 짜증이 날지언정 대놓고 앞에서 얘기하진 못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세일즈로 전향 후 나의 주 업무는 일명 '파트너사'라고 불리는 협력사 관리였다. 직접 고객을 만나 영업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파트너사를 발굴하고 교육하고 지원해서 이들을 통한 수익을 창출하는 것. 대형 SI부터 작은 중소기업들까지 전체적인 수는 너무나도 많지만, 특정 분야에서 잘하는 플레이어들은 사실 몇몇 없고 그 리스트가 뻔하다. 내가 담당하던 업체들도 우리 회사가 한국시장에 정식으로 진출하기 전부터 이미 사업을 하던, 몇십 년간 이 분야에서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고 잔뼈가 굵은 속칭 '빠꾸 미' 들이었다. 심할 때는 이들의 입김이 너무 세서 회사 간 갑을관계가 바뀌어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여하튼, 이런 회사 내외부로 같이 일하는 40~50대 남자 시니어들은 내가 관리자 입장에서 요청하는 것들을 바로바로 해주는 법이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처음엔 '많이 바쁘시겠지만 시간 되실 때 ~~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온갖 미사여구와 함께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그들의 상황을 하나하나 봐주자니 일이 진행이 되지 않았고 이를 깨달은 뒤로 나도 남자들의 언어를 쓰기 시작했다. 만났을 때는 사근사근하더라도 공식 업무 메일은 딱딱하게 '다나까'를 쓰고, 업무 A 를 언제까지 어떻게 해서 주세요.라고 데드라인과 함께 간단명료하게 요청했다. 그러자 그들은 시간에 맞추어 회신을 했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객 계약을 수주할 때는 또 어땠는가. 어린 여자 관리자라 잘 모를 거라 생각한 건지 아님 날 물로 (?) 본 건지 본인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판을 다 짜 놓고 나에겐 마지막 순간에 최종 컨펌만을 요청했다. 처음엔 모르는 척 넘어갔지만, 장난이 심해지는 걸 발견했을 때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같은 배를 탄 파트너 관계라지만 이익이 걸려있으면 사람은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꼭 우리 회사가 아닌 다른 업체로 배를 갈아탈 수도 있기에 실력이 있는 곳일수록 콧대가 높았고 서로 조건을 맞추다 보면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느낀 점은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면서 상대에게 맞춰주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끌려간다는 것. 군대 나와서 상명하복에 익숙한 우리나라 남자들과 일하려면 성별 간의 특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의 스타일에 어느 정도 맞추는 게 서로 속 편하다는 것.

    


        

        하루는 우리 파트너사가 되고 싶다고 먼저 연락 온 업체가 있어서 직접 사무실로 대표를 만나러 방문했다. 업계에서 몇십 년간 일하셨다는, 60대 초반 정도로 유추되는 대표님. 말투만 들어봐도 '아~ 영업 출신이시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미지였다. 서로 회사 소개를 하고 앞으로 어느 분야에서 함께 비즈니스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생뚱맞게

'아~ 그런데 이 바닥에서 여자 영업 찾기 힘든데 대단하시네요. 나이도 엄청 어려 보이시는데. 혹시 나이가?'


        하... 또 시작이네. 앞으로 같이 어떻게 돈 벌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없고 제일 궁금한 게 내 나이인 건가.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하하. 어휴 여자로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바닥이 여자가 영업하기 힘들죠. 근데 보시다시피 제가 사이즈가 남자 사이즈라. (손 제스처와 함께) 통이 크잖아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오늘은 약속이 있는데 다음번에 날 잡고 술 한잔 하시죠 대표님.'


        난 알쓰다. 알콜쓰레기. 술 한잔만 들어가도 온몸이 벌~개지지만 알게 뭐람. 불편한 질문엔 그저 너스레 떨면서 웃음으로 넘기면 모두가 해피하다. 혹자는 칭찬일 수도 있는데 저 말을 왜 이렇게 꼬아서 듣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말에서 느껴지는 어감이라는 게 있다. 순수하게 '오 대단하시네요~'와 '나 이 바닥에서 뼈 굵은 사람인데 네가 지금 관리자라고 왔어? 애송이 같은데'의 어감에는 큰 차이가 있지. 후자는 스쳐가는 찰나의 순간순간에 그 속마음이 묻어난다. 예를 들면 유선상으로는 내 직급만 듣고 아주아주 과할 정도로 깍듯하게 각 잡힌 어투였다면 직접 대면한 후에는 놀람+당황의 얼굴과 함께 어쩐지 점점 더 편해지면서 끝을 흐리는 식의 존댓말과 반말이 섞인 그 중간쯤의 말투로 변하는 것과 같은 것들.



        무례한 케이스를 몇 가지 적어봤는데, 꼭 이런 것뿐만 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여자라서 뜻하지 않게 제외되는 경우가 있다. 회사 워크숍을 갔는데 너무나도 당연하게 남자들끼리만 족구 팀을 짜 놓고 내기를 한다길래 '저도 할 건데요?' 하고 비 맞으면서 같이 공을 차거나, 고객사와  미팅 후에 접대를 하는데 2차를 마무리한 후 소수끼리 쑥덕대고 있어서 뭔가 했더니 그들끼리 룸을 간다거나. (요즘은 법이 강화되어서 커피 한잔도 고객이 결제하고 식사/접대 모두 다 안 한다. 오해 마시길.)  어쩔 수 없이 고객 비위 맞추러 쫓아다녀야 하는 이사, 상무님들은 중간에 빠질 수 있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글쎄..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접대 얘기가 나오니 갑자기 생각났다. 나를 아끼는 선배님 중 한 분이 해준 조언이 성차별 적인 경우도 있었다.


'써니야~ 넌 미팅 만가고 식사랑 접대는 웬만하면 파트너들 보고 가라고 해. 젠틀한 고객들도 많지만 특정 업종은 아직도 전통(?) 적인 꼰대들도 많고 가끔 또라이들도 있어서 괜히 기분 나쁜 일 겪을 수도 있으니까. 요즘엔 술자리 안 가고도 스마트하게 영업 잘할 수 있으니 굳이 가지 마.'


'에이~ 일로 만난 사이인데 설마요. 서로 바닥 좁은 것도 다 아는데. 제가 어린 여자라 오히려 제가 더 민망할 정도로 고객들이 조심하시던데요?'


'아니야 세상에 또라이들 많다? 지금은 네가 너무 어려서 그렇지 오히려 30대 되고 나이 좀 더 먹으면 알 거 다 안다고 생각해서 선 넘는 놈들도 있어. 그리고 내 주위에 영업하다 보면 딜 어떻게든 따고 돈 벌어야지 하는 승부욕이 생겨서 실수하는 사람들도 본 적이 있어서. 물론 네 성격 잘 아니 기우인 건 아는데 그래도 마케팅하다가 영업한다 하니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여기에 추가로 다른 선배님은 업계에 영업으로 유~명한 여자분이 있다고 하셔서 소개해달라 하니 돌아오는 대답이 참 황당했다. '아니.. 일을 잘해서가 아니고 오빠 영업으로 유명한 분.'

        와우 그동안 내가 순진했던 건가...... 형님 영업은 들어봤어도 오빠 영업 이라니. (결국 그분의 이름은 듣지 못했다. 아직까지 미스터리.) 남초 바닥에선 그들과 어울려도 문제, 어울리지 않아도 문제. 내가 남자였으면 이런 건 고민거리도 아닌데... 왜 여자로 태어나서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애니웨이, 남자+여자 섞어놓은 제3의 성으로 일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짧고 간단명료하게. 담배는 안 피워도 미팅 중간에 같이 나가서 일 얘기하고, 술 못 마셔도 술자리에서 다 같이 으쌰 으쌰 하고, 같이 몇 달 내내 밤새서 제안서 쓰고, 아무리 친해져도 나이 많은 시니어분들께는 선 넘지 않고 예의 지키고. 여기에 내 원래 특성을 따라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사적인 이야기나 기념일 챙기고, 간식꾸러미와 홧팅하시라는 메모, 상황에 따른 기프티콘이나 술자리 전후 여명 같이 정말 작지만 받는 분들이 기분 좋아지는, 일반적인 남자들은 놓치기 쉬운 부분들. 귀찮을 때도 있지만 내가 좋아서 한다~ 는 마음으로 하면 서로가 즐겁다.




        남초 IT 업계에서 얕보이지 않기 위해, 그들과 동등하게 어깨를 맞대고 일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전투복이라 부르는) 각 잡힌 와이셔츠와 칼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아이라인을 관자놀이까지 쭉~ 빼고 미팅을 나간다. 앞으로는 성별과 나이에 따른 편견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로만 평가되길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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