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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Im Jul 16. 2020

꼬리표 #1. 동양인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닌 그 중간 어드메




첫 번째 꼬리표는 동양인이다. 나는 그 누가 봐도 동양인 같이 생겼다. 쌍꺼풀 없는 작고 찢어진 눈에 새카만 머리카락. 21호와 23호 중간이라 파데 두 개를 섞어 써야 하는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은 피부톤. 부모님 덕분에 체구는 글로벌 스탠다드 사이즈 (?)이지만, 출퇴근길 지하철 손잡이에 머리를 얻어맞는 눈에 띄게 큰 키 외에는 천상 동양 여자다.



        동양인 꼬리표를 다룬다 하니 내가 엄청난 인종차별을 당했을 것이라 기대하며 들어온 분들에게는 미안하다. 다행히(?) 태국으로 이주한 덕분에 유년시절은 행복했다. 원래 태국은 이른 개방 후, 사회 곳곳에서 개발에 도움이 되었다 하여 일본인이 환대를 받았다. 방콕 한복판 제일 비싼 노른자 땅에는 일본인 빌리지가 자리 잡고 있었고, 어디에서도 일본 음식과 제품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다음 타자는 한국이었다. K-POP 이 크게 유행하기 전이지만, 한국 드라마와 화장품, 음식은 20년 전에도 유명했다. 대부분의 태국인들은 한국인에게 우호적이었고, 또 어깨에 힘 뿜뿜 주며 그들의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태국 남부 시골의 현지 학교에서 일 년간 손짓 발짓해가며 태국어를 익힌 후에 방콕으로 상경(?) 하여 미국식 국제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내 체구의 반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태국 아이들 사이에서 지내다가 만나게 된 몇십 개 국가에서 온 다양한 아이들은 당시 에너지 넘쳤던 나에게 새로운 자극이었다! 국제학교는 날라리들이 많을 것 같다며 일부러 크리스천 학교를 고른 아빠 덕분에 얌전한 선교사 자녀들이 많은 학교에 입학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란 머리, 빨간 머리, 피어싱 한 아이 (왜인지 모르겠지만 태투는 금지였다), 정말 별별 아이들이 다 있었다. 


        이때부터 나의 특이한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TMI 지만 10~20대의 나는 ENFP 였다. 구속당하기 싫어하고 자기 색깔 뚜렷한 자유로운 영혼! 한국에서 엔프피 여자는 특히나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던데 나도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랐으면 지금은 I로 시작해서 J로 끝나는 그 무언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회생활 10년 한 지금은 ENTP가 되었다). 다행히 나의 부모님은 오픈마인드이셔서 기본 예의는 강조하셨지만 그 외의 것들은 전적으로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그리고 나는 아빠가 어릴 때부터 하시던 말씀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써니야, 남자건 여자건 이성이 하는 것들도 할 줄 알아야 해. 그래야 나중에 사회생활할 때도 대화가 통하고, 결혼한 후에도 부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법이야. 남녀 상관없이 스포츠 즐길 줄 알고, 외국어 하나,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인생이 재밌어진단다." 

                

        이런 부모님 밑에서 나는 남동생과의 성차별 없이 하고 싶은 건 다 배워가며 훨훨 날아다녔다. 이렇게 타고난 나의 엔프피 성향은 미국식 국제학교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 학교에서는 정답을 몰라도 모두가 손을 들고 자신 있게 발표를 했고, 피 튀기게 토론을 했지만 서로의 의견을 존중했고 결과를 인정할 줄 알았으며, 수업시간에 피곤하면 교실 뒤편에 있는 빈백 소파 (bean bag) 위에 누워서 수업을 받아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에세이나 시험을 친 뒤에 결과가 이해가 가지 않으면 얼마든지 이의 제기를 하고 선생님과 상담을 통해 다시 점수를 받았다. (고등학교였지만) 한국의 대학교처럼 내가 원하는 과목을 골라 자율적으로 나만의 시간표를 만들었고, 학점에 대한 책임과 대학 진학에 대한 결정도 오롯이 내 몫이었다.


        몇십 국가에서 온 아이들과 섞여 지내다 보니 나는 어떤 면은 서양인적인 성향을, 또 다른 면은 동양인적인 성향을 띈 아이가 되었다. 좋게 말하면 글로벌 시대에 맞는 하이브리드 형, 나쁘게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쯤 되면 독자들은 '아니, 무슨 서양 국가에서 무시무시한 인종차별을 겪은 것도 아니고 마냥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로 끝나는 동화 수준 아냐? 근데 감히 동양인 꼬리표를 달고 있다고 쓰다니?!?!'라고 분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워워~ 꼭 일일연속극처럼 드라마틱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일단 지금까지의 기나긴 썰은 내가 툭하면


 '너 같은 캐릭터는 본 적이 없다.' '역시 특이해.' '써니는 전형적인 한국 여자와는 달라.' '넌 참 이해하기 힘들다. 어쩔 때 보면 서양인 마인드인데 또 어떨 때는 천상 한국인이란 말이지.' '한국 패치가 지난 10년간 너무나도 잘돼서 잊고 지내는데.. 한 번씩 하고 오는 귀걸이 스타일을 보면 아 이누나 해외파지 하고 느껴.'


등등과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듣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 중간 경계선 그 어딘가에서 줄타기를 하는 써니가 완성되었다. 날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조차도 '참~ 내 딸이지만 물건은 물건이야.'라고 하시는 유일무이한 캐릭터. 

        


        앞서 말했듯이 심한 인종차별을 당한 적은 없지만, 동양인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와 기대치는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안다. 그리고 서양인들의 기저에 깔려있는 편견이 은근슬쩍 드러날 때마다 기분이 더러웠다.


'동양인들은 영어 딸리고 브레인스토밍도 못하고 의견도 없이 조용히 따라만 가잖아. 상사가 하란대로 예스맨처럼 일만 하고 인생을 즐길 줄도 모르지.'

        

        다행히 계속 글로벌 기업에서 일했던지라 서로의 문화를 존중해주었지만, 가끔씩 기분 상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한 번은 유럽 출신 담당자가 방한했는데, 그는 한국시장과는 너무나도 큰 갭이 있는 자료를 들고 와 '선진국' 을 따라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아는 아직 갈길이 멀다며 그 특유의 흘리는 발음으로. (동양인들 보고 영어 못한다는데 하... 난 유럽 출신들 발음을 제일 못 알아듣겠다.) 사석에서도 자기네들 역사와 문화에 대한 부심들을 끝없이 나열하는데 맞장구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듣다 듣다 지쳐 '너 쏘주밤 (Soju Bomb) 아냐???' 하고 맥주잔에 한가득 쏘맥 말고 수저로 탁! 쳐서 회오리를 만들어 먹였다. 상추쌈 크게 싸서 욱여넣어주고 이거 먹고 그입 다물라~ 하는 동안 여기에 동석한 상무님이 수저로 맥주병 뿅~ 따고 고진감래 술의 뜻을 풀어주면 브라보~ 나오고 게임 끝!


    #영어: 뚝딱뚝딱 콩글리쉬?

        외국 동료들과 처음 만나면 '와우~ 써니 너 왜 이렇게 영어를 잘해?' 라며 놀란다. 해외에서 살았다고 하면 '아~ 그럼 그렇지. 어쩐지 미국식 발음이더라고. 정통 한국인들은 영어 못하잖아. 물론 그 특유의 딱딱한 발음도 귀엽고 재밌어!' (TMI 지만 영어권에서 살아보진 못해서 사실 내 영어 구리다.)


        물론 그들은 날 칭찬하고자 한 말이겠지만 요즘 영어 잘하는 동양인들이 널린 세상에 그걸로 놀라며 호들갑 떠는 게 그리 달갑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리고 발음. 정통 미국, 영국식 발음하는 게 아닌 이상 (물론 미국이랑 영국에도 사투리 있고 발음들 다양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른 발음을 가지고 있는데 대체 왜 그게 농담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건지. 그리고 언어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 중 하나이기에 발음보다는 컨텐츠와 얼마만큼 서로 잘 소통이 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일하는 스타일: 수동적인 일개미?     

        매번 외국인 임원들에게 듣는 피드백이 있었다. '전형적인 동양인과는 다르네' '야망이 있어서 좋아.' '상명하복이 아니라 자기 소신대로 일하는 스타일이 맘에 들어' '다른 후보자들이 나이랑 경력이 훨씬 더 많지만 너같이 강한 사람은 없었어' '네 안엔 스파크가 있어. 난 그걸 믿고 너에게 투자를 해볼게.' 


        어떤 임원들은 '동양인 직원들은 말이 너무 없고, 경직되어 있고, 의견을 내라 하면 서로 눈치만 보고, 절대 질문을 하지 않고, 주도성 없이 매번 상사의 컨펌을 원한다.'라고 평한다. 물론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다르고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일하는 스타일에 차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모든 동양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란 말이다! 팀빌딩 액티비티 (Team building activity, 워크숍)를 할 때면 난 처음엔 피곤하니까 꼭 조용히 구석에서 찌그러져서 들어야지~ 모드로 시작했다가 결국엔 열심히 손들고 발표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나 같은 시끄러운 아시안 관종 (?) 들은 틀림없이 있다.


        일상적인 업무를 할 때도 동양인 직원에 대한 이미지는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야근하는 일개미 느낌이다. 숫자에 강하고, 보고서를 잘 만들고, 라스트 미닛에 일을 던져주어도 군말 없이 후다다닥 끝내서 제출하는 성실한 일개미.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들은 대부분 서양인 리더들이 회의하는 자리에서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하지만 모든 동양인들이 그 서포터의 역할을 더 선호하는 건 아닌데 말이지. 나같이 엑셀 창 앞에선 '까만 건 숫자요 하얀 건 바탕이다~' 라고 눈 돌아간다며 몸서리치고, 앞에서 아이디어 뿜뿜 토론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외모와 스타일: 하늘하늘 여성미?

           '동양인 여자들은 작고 야리야리하고 스타일도 여성스러워.'라는 게 대부분의 인상. 그런 사람들 사이에 한국 남자 평균 신장보다 더 큰 내가 바지 정장에 이름 새겨 넣은 맞춤셔츠 받쳐 입고 하이힐 신고 나타나면 다들 움찔한다. 그리고 먼저 악수를 청하면 또 한 번 놀라고. 한국 여자들은 대부분 하얀 베이스에 맑은 메이크업을 좋아하던데 난 아이라인 그린 것만 봐도 다르다고 이야기한 사람도 있었지. '여성'에 대한 편견은 다른 꼬리표 글에서 다룰 예정이라 여기선 간단히 언급만 하고 넘어가겠다.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너무나도 많지만, 업무와 관련된 몇 가지만 나열해 보았다. 뭔가 겪었던 에피소드들도 많았고 하고 싶은 얘기도 분명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써보니 깊이 없이 횡설수설하다 만 듯한 기분. 아쉽지만 일단 여기서 마무리. 



        제가 미처 쓰지 못한 고정관념이나 본인의 경험담을 댓글로 공유해주세요.
우리 모두 같이 격하게 손뼉 쳐가며 공감해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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