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와 기획자의 차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퇴근 후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아 노트에 글을 끄적이며, 마치 무명의 소설가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나의 취미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끄적인 이야기는 자기만족에서 그쳤고, 소설가가 된 듯한 기분은 단지 허상에 불과했다. 다음 날이 되어 소설가와 전혀 상관없는 직장으로 출근할 때가 되면 현실을 마주해야 했고, 그런 하루를 반복할수록 가슴 한켠에는 삶에 대한 불만족이 쌓여갔다. 꿈만 꿀 줄 알았기에, 그때의 나는 바보였다.
억압된 욕구는 점차 표면으로 떠올랐고, 비로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의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면 독자라는 존재가 필요했다. 내 이야기를 읽어줄 독자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처음으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독자와 연결고리를 갖는 방법을 구상했다. 인터넷은 접근성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었기에 효과적인 수단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인터넷도 플랫폼마다 취급하는 콘텐츠가 달랐다. 단순히 텍스트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웹소설 플랫폼에 올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영상 콘텐츠로 제작해 유튜브 같은 동영상 플랫폼에 올리는 방법도 존재했다.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드는 작업은 다소 번거로웠지만, 유튜브는 다른 플랫폼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이었기에 나는 후자의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처참히 실패했다.
나는 나의 이 그럴듯한 계획이 실패한 원인을 분석했다. 수많은 원인이 있었지만, 핵심은 하나였다. 당시의 나는 플랫폼과 콘텐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실패의 원인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은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실패를 통해 배우는 과정이 보람됐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수록 궁금한 것들은 더욱 많아졌고, 그 사실은 나를 기대에 부풀게 만들었다. 앞으로 알아갈 지식들이, 그리고 충분히 성장한 뒤의 내 자신이 기대됐다.
플랫폼과 콘텐츠에 대한 공부를 계속했지만 어느 순간 이론만 공부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나는 관련 분야에서 여러 사람들과 협업하면서 실제 업무를 경험한다면 이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운이 좋게도, 직종 전환의 기회를 얻었다. UX 디자이너가 되어 플랫폼 설계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이후 애니메이터가 되어 콘텐츠 제작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어떤 프로젝트를 하든 가장 처음에 하는 것은 바로 ‘기획’이라는 것이었다. 가상의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이 기획이라는 것에서 비슷한 요소를 발견하고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서비스 기획, 콘텐츠 기획, 공연 기획, 마케팅 기획 등 기획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본질은 같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것. 결국 기획이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초석’과도 같다.
현재 나는 애니메이터로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영상 콘텐츠에서의 기획이란 스토리보드를 작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토리보드는 영상의 흐름을 장면별로 정의한 것을 말한다.
하지만 스토리보드는 콘텐츠의 큰 틀만을 잡아줄 뿐, 제작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정의해주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콘텐츠 제작자는 세부적인 부분들을 스스로 기획해야 한다. 스토리보드에 내재된 고객의 니즈를 파악한 뒤, 그에 맞는 영상 스타일과 자막 디자인, 트랜지션 효과 등을 고민해야 하며, 삽화나 오디오 등 영상에 필요한 재료들도 탐색하고 선별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아무리 면밀히 거쳐서 제작했다고 해도, 결과물이 고객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는 고객의 피드백을 통해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다시 기획하면서 제작하는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다보면, 비로소 콘텐츠는 완성된다.
살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며, 그때마다 삶으로부터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요구받는다. 나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현재의 업무를 통해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게 되었으므로 지금은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물론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남아있고, 삶은 앞으로도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계속 던져줄 것이다. 하지만 충분한 기획력을 갖추고 있다면, 기획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 방안을 탐색하여, 실행 가능한 계획을 세운 뒤, 최종적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기획의 메커니즘은 단순히 비즈니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이야기를 구상할 때가 가장 즐겁다. 하지만 이제는 허황된 이야기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해보는 것에도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몽상가에서, 이제 기획자가 된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