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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현 Feb 20. 2023

수치심은 피해자의 몫이 아니다

매일노동뉴스 기고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수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 심리학용어사전은 수치심을 “다른 사람이 자신을 결점이 있는 사람으로 바라본다고 판단할 때 발생하는 정서”라고 말한다. ‘자신의 결점이 외부에 노출됐을 때 느끼는 정서’이며, ‘자신의 자아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의해 유발되는 정서’라고 설명한다.



‘수치심’이란 감정은 이제껏 성폭력의 법적 판단 기준에 중요한 요소로 다뤄져 왔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이나 아동복지법 등의 법률은 ‘성적 수치심’을 법적 판단의 주요한 요건으로 하고 있다. 2019년 의정부지법은 레깅스 입은 여성을 불법 촬영한 30대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경찰 조사에서 “기분 더럽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 왜 사나 하는 생각을 했다”라고 한 것에 대해 “불쾌감의 표시이지 성적 수치심은 아니다”고 판단했다. 특정 신체를 부각해 불법 촬영하지 않았으며, 직접 신체 노출이 적고, 레깅스는 일상복이라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최근의 추세는 변하고 있다. 지난 9월23일 국립국어원 국어사전 정보보완심의위원회는 표준국어대사전상 ‘성추행’ 정의를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일방적인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해 물리적으로 신체 접촉을 가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라는 기존의 정의에서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상대방에게 성적 불쾌감이나 모욕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로 변경했다. 불쾌감은 “못마땅해 기분이 좋지 않은 느낌”(표준국어대사전)을 의미한다. 이는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느끼라고 강요하지 않는 단어이며 피해자의 실제 감정과 더 부합하다는 평을 받는다.



앞서 말한 레깅스 불법 촬영 사건에서도 대법원은 항소심과는 다른 판단을 했다. 성적 자유는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를 의미한다”며 “피해자가 성적 자유를 침해당했을 때 느끼는 성적 수치심은 분노·공포·무기력·모욕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성적 수치심의 의미를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이 표출된 경우만으로 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피해자의 다양한 감정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항소심의 무죄선고를 유죄취지로 파기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도 올해 7월 성범죄 양형기준의 특별가중인자에서의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대검찰청은 직장내 성희롱 조사 과정에서 근로자가 ‘성적 수치심’ 등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하는 규정에서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으로 바꿨으며, 일부 다른 지침상의 ‘수치심’ 용어도 ‘불쾌감’으로 변경했다.



대검찰청 지침은 바뀌었지만, 직장내 성희롱과 관련해 아직 바뀌지 않은 법 조항이 하나 더 남아 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내 성희롱이 발생할시 사업주는 피해근로자 등이 조사 과정에서 성적 수치심 등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에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조사자의 잘못된 행위를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표현’으로 규정하고 “성폭력범죄 피해자는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줄 수 있기에 수치심이란 용어를 불쾌감으로 변경한다”는 취지의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현재까지도 소관 위원회 심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피해자다움’은 없다. 실제로도 모든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피해자는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성폭력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기도 하며, 주변의 반응을 걱정하거나 원망하거나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회사의 반응에 허무함을 느끼거나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가해자의 보복 우려에 무서움을 느끼거나, 2차 피해 때문에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이의 반응에 슬픔이나 미안함을 느끼거나, 지지와 응원에 힘을 얻기도 한다. 대응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거나 대응할 방법이 없어 무기력함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피해자는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성적 수치심을 느껴야만 피해가 인정되는 것은 틀렸다.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가해자의 몫이다.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는 사람,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을 느껴야 하는 사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사람은 가해자다. 직장내 성희롱 피해를 예방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느껴야 할 감정이다. 피해자 관점에서 직장내 성희롱 사건을 대응하지 못했고 2차 피해를 방치한 책임자들이 느껴야 할 감정이다. 피해자에게 부끄러움을 강요하지 않는 용어 변경이 필요하다.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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