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졸업이나 입학 같은 대소사마다 늘 선물을 챙겨주던 외가의 한 분이 계셨다.
그 댁에 가면 찬장을 열어 잔을 하나 고르라 하시고 차나 코코아를 타주셨다. 유럽에서 오래 지내신 덕분인지 곳곳에 고운 잔과 장식용 접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때부터 나도 그런 찬장에 대한 로망을 품게 되었다.
대학 시절, 오랜만에 찾아뵈었을 때였다.
그분은 살짝 수줍은 듯 웃으며 책장을 열더니
시집 두 권을 내어주셨다.
“등단을 했단다.”
그 한마디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에 돌아와 시집을 펼쳐 읽었을 때, 평소 조용하고 온화했던 그분 모습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날카롭고 깊은, 전쟁의 그림자와 세월의 고단함이 담긴 시들.
사랑스럽게만 보이던 분이
이토록 차갑고 깊은 언어를 품고 있었다니,
나는 한동안 책장을 덮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