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by 소이

한동안 아무 소식 없던 선배에게서

“시간 되면 같이 걸을래?”

문자가 왔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묘하게 따뜻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선배는 등산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짙은 회색 바람막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자끈.

소이는 웃으며 물었다.

“선배 어디 가세요? 이렇게까지 준비하셨어요?”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광복궁 뒤쪽 산성길 있잖아.

거기 조용하고, 요즘 단풍도 예쁘대.”



둘은 천천히 걸었다. 발밑에서는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졌고, 가을빛은 산허리를 타고 내려와

두 사람의 어깨 위에 고요히 앉았다.


산성길의 돌담 사이로 붉은 단풍이 흩날렸고, 햇살이 이따금 그녀의 머리칼에 닿았다. 그 순간마다, 그는 오래전의 시간을 떠올렸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떨어지던 잎, 차마 주워 담지 못했던 마음.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정작 입에서는 숨소리만 흘러나왔다.



산길이 끝나고 어떤 노포 앞에서 선배가 갑자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 막걸리 한 잔만 할게.”


부침개 한 접시와 막걸리를 시켰다. 기름 냄새와 막걸리 향이 섞여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의 잔이 멈췄다.

“소이야,

그날은 내가 너를 붙잡았어야 했는데.”

그 말이, 낙엽처럼 내 안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선배는 잔을 내려놓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막걸리 표면에 비친 불빛이 흔들릴 때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이야…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그 목소리엔 오래 묵은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너 말고는 내가…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들더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어 말했다.

“사실…

그동안 허해서 이 사람 저 사람 소개도 받아봤어.


예쁜 여자는 싹수없고,

어린 여자는 철없고,

경제력 좋은 여자는… 왠지 재수 없더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약간 붉게 젖어 있었다.

“아냐, 사실 그런 말 하는 것 다 변명 같아.

그냥… 네가 너무 그리웠어, 소이야.

이젠 정말, 너 아니면 안 되겠어.”


바람이 불어 낙엽이 테이블 위로 흩날렸다.

그녀는 그저 잔을 바라봤다. 막걸리 속에서 하얀 거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와의 시간처럼, 이유도 없이 사라져 버린 마음처럼.


소이는 말없이 걸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리자 선배는 잠시 멈춰 서서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차가워진 손을 자기 주머니 속으로 옮기며, 짧게 한숨처럼 말했다.

“춥지?”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골목에 이르렀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그녀를 벽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순간 숨소리만 섞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작게 속삭였다.

“미안해. 그때처럼 또 참지 못하겠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춥던 바람이 잠시 멎은 듯했다.

마음 한구석이, 또다시 저리게 아파왔다.



이번 주부터 연재 요일이 토요일에서 금요일로 변경되었습니다. 주말엔 잠시 숨 고르고, 금요일에 찾아뵐게요 :)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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