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 이후로, 나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선배는 불안했는지 평소보다 자주 연락했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높은 빌딩 창가를 따라 물결치는 불빛이 잔잔히 흔들리고, 은은한 와인의 향이 공기 속에 흩어졌다.
식사 후, 그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내 손목을 살짝 잡았다.
“이번에도… 또 도망칠 거야? 더 이상은 그러지 마.”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밤이 깊어가며 도시는 유리창 너머로 흘러가고, 우리 둘만 남은 듯한 공간에서 긴 눈빛이 이어졌다.
…
창가에 나란히 앉자 야경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창에 비친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스쳤고, 그 빛이 내 가슴속 깊이까지 번져왔다.
…
그의 숨결이 어깨에 닿는 순간, 공기가 아주 살짝 떨렸다. 그때,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땀 한 방울이 내 입술 가까이에 닿았다.
찰나의 순간, 모든 감정이 뒤섞였다. 망설임과 열기, 두려움과 끌림이 서로의 온기 속에서 녹아내렸다.
나는 그를 아련하게 바라봤다.
밖에서는 불빛이 잔잔히 흔들리고, 세상은 멀리서 아주 느리게 숨 쉬었다. 사랑은 그렇게 조용히, 우리의 심장보다 느리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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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는 아델의 노래를 틀었다.
“같이 듣자.”
조용한 목소리, 따뜻한 품.
잠시 후 그는 휴대폰을 들고 미소 지었다.
“난생처음이네, 스케줄 조정한 건.”
그는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냥… 너랑 조금 더 있고 싶어서.”
공기가 느리게 흔들렸다. 그의 말이 방 안에 잔향처럼 퍼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세상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창밖으로 엷은 햇살이 번지고,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그 말은 낮고, 진심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결혼하고 싶은 이유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서야.”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의 말이 너무 솔직해서 웃음이 났다.
그는 계속 말했다.
“사실 네가 떠나지 않는다면 결혼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없다면 넌 언젠가 날 떠날 거야.”
그 말이 웃기기도 하고, 이상하게 가슴을 찔렀다.
사랑의 고백인데, 슬픈 문장이었다. 나는 조용히 어이없게 웃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아렸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는 손끝이 조용했고, 빛이 그의 어깨를 따라 흘렀다. 얼굴엔 아쉬움과 아련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올게. 오늘 일정 없지?
나 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다정했지만, 내 숨을 살짝 조였다.
창밖으로 흩어지는 햇살이 그의 뒷모습을 스쳤다가 천천히 내 쪽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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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선배의 티셔츠를 입었다. 길게 내려온 옷자락은 거의 원피스처럼 보였다. 소파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노트북을 열고 매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띠리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순간, 심장이 툭 떨어졌다.
발소리가 다가왔고, 낯선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가정일을 돕는 분이었다.
“아이고 깜짝이야. 아, 선생님 약혼한 아가씨군요?
이쁘네…”
나는 당황해 웃었다. 아주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정말 좋은 분이에요. 배려심 깊고… 남자 잘 잡았네.”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숙여 예의 있게 웃었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집을 나서며 문을 닫자 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쳤다. 잠시 후, 근처 카페. 커피 향이 퍼지는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