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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범 May 18. 2018

06 인간 이해하기: 뇌진화의 관점에서.첫 번째 이야기

집단으로부터 소외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초등학교 고학년 딸을 둔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딸과 단둘이 식사하게 되었다.   

“학교 생활은 재미있고? 친구들은 어때?”

딸은 불평하듯 대꾸했다.

“난 존재감이 없어. 존재감이 제일 중요하단 말이야. 그래야 인기도 있고”

친구는 딸을 설득하려고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존재감이 그리 중요하지 않아. 지금 친구도 중학교 가면 헤어지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돼. 성인이 되면 다시 새로운 친구가 생기고. 친구를 억지로 사귀는 것보단 너의 일을 열심히 한다면 좋은 친구들이 저절로 생겨. 친구를 위한 친구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아.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

슬프게도 친구의 설득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녀의 친구 문제가 걱정거리인지 아닌지를 부모가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집단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커다란 두려움이다. 이것의 내면에는 ‘본능적 생존 욕구’와 연관되어있다.


인간은 초기 인류 이전부터 무리를 이루며 살아왔다. 무리를 이루어야 외부의 위협과 생존의 문제에서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먼 과거 시대에는 집단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이들에게 집단 내에서 잘 어울리느냐 그렇지 않냐의 문제는 곧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특히 성장기 청소년들은 자신과 주변 환경과의 관계에서 오는 감정적 반응에 더욱 민감해진다. 그들의 뇌에서 특정 부분이 더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이 곳은 내측 전전두엽이다. 인간이라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내측 전전두엽이 더욱 활성화되도록 태어났다. 이는 성장기 아이들의 감정 조절은 그들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의지로만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때문에 그들에게 의식적으로 조절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인간의 행동을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뇌와 관련된 두 가지 사항을 먼저 알아야 한다.


첫 번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들의 궁극적 목적은 ‘생존’이라는 점이다. 집단 간의 갈등, 타인의 성향이나 성격,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트라우마, 남녀의 차이, 주의력 결핍, 난독증 등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쉬워진다.


두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엄청난 문명을 일궈낸 위대한 뇌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편으로는 석기시대의 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DNA 상으로 가장 가까운 침팬지나 보노보와 인류의 조상이 갈라선 지는 약 5백만 년이 되었다. 이후 돌조각 같은 구석기 유물을 남겨놓은 것이 250만 년 전이다. 이후 진화를 거듭하다 현재 인류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약 20만 년 전이고 농경생활을 시작한 것은 약 1만 1천 년 전이다. 인류 역사의 99% 이상은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살았던 구석기시대이다. 


뇌만 고려해보면 이러한 관점은 더 분명하다. 뇌 진화의 역사는 훨씬 이전부터 시작하였고 수 천만년이 넘는다. 인류가 문명화된 모습을 이룬 것은 전체 뇌 진화 역사의 0.1%도 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무리 우리가 똑똑한 뇌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지라도 두개골 안의 인간의 뇌는 석기시대의 뇌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적 이성과 지성을 통해, 주먹보다는 머리를 이용해 우아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우리 뇌에는 사냥과 수렵을 하던 시대의 뇌 작동 방식이 여전히 남아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결합하여 생각하면 인간 뇌의 특징은 좀 더 분명해 보인다. 인류는 수백만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습득된 석기 인류의 생존 방식을 DNA를 통해 후손의 뇌에 설계도를 남겼다. 문제는 이러한 설계도가 생각만큼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역시 우리가 해결할 과제이다.  


다시 집단에 속하려는 원초적 본능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차이가 없는 두 집단을 경쟁시키면, 적대감, 경멸적 편견 등 사회적 갈등 징후들이 실제로 생긴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집단 내에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감수하기까지 한다. 참고로 언급하면 이를 교묘히 이용해 경제적 혹은 사회적 이득을 취하려는 간사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집단이라는 테두리가 아이들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주는 1950년대 연구가 있다. 외떨어진 숲 속 캠핑장에 어린이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컵스카우트 야외 활동처럼 합숙시켰다. 합숙 동안 야구 게임을 통해 두 집단을 서로 경쟁시키며 이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그러자 어느 날부터 두 집단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집단에 속하기 전에는 개개인에 대해 편견이 없던 아이들이 집단에 속하자 다른 집단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어지는 연구 결과이다. 두 집단에게 수도관 고장 해결이나 트럭 밀어주기와 같은 협동을 통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목표를 주자 두 집단 간 갈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어른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어른의 경우는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보면 내 마음도 편치 않다. 이를 공감이라고 한다.


그러면 내가 속한 집단의 사람에 대해 느끼는 공감과 다른 집단의 사람에 대해 느끼는 공감이 비슷할까?


이에 관한 실험이 있다. 데이비드 이글먼과 연구팀은 여러 종교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통증을 일으키고 이를 지켜본 사람의 고통 공감지수를 조사했다. 특정 종교인의 손을 바늘로 찌르는 화면을 보여주면서 화면에 손의 당사자가 믿는 종교를 표시하였다. 결과는, 개인차가 어느 정도는 있었지만, 평균적으로 피험자의 뇌는 같은 종교인에게 더 강한 고통 공감 반응을 보였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무신론자끼리도 더 강한 공감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단지 화면 속에 종교를 표시한 단어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고통 공감 반응이 상대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놀라운 결과이다.  


그럼 집단으로부터 소외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오미와 동료들은 한 사람이 다른 두 사람과 컴퓨터상에서 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하는 실험을 했다. 사실 다른 두 사람은 컴퓨터이지만, 실험 참가자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놀이가 시작한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참가자를 배제하고 컴퓨터끼리만 공을 주고받았다. 이 순간에 참가자의 뇌를 스캔했다. 놀랍게도 참가자의 뇌에는 육체적 통증을 느낄 때와 같은 뇌 구역이 활동했다. 즉 소외될 때의 심정을 육체적인 통증, 예를 들면 발을 찧어서 아픈 통증과 동일하게 뇌에서 느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우리가 아플 때 먹는 타이레놀을 복용한 후 집단 게임에서 소외되었을 때의 심정을 수치로 측정했다. 타이레놀을 복용한 참가자들은 그렇지 않은 참가자들보다 상실감을 덜 느꼈다. 이러한 결과도 소외됨으로 인한 상실감을 육체적 통증과 같은 것으로 뇌에서 취급하기에 나온 것이다. 만약 주변의 누군가가 실연의 고통으로 괴로워한다면 빨리 타이레놀 복용을 알려주길 바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집단에 속하기를 원한다. 집단에서 배제되면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집단 내부의 사람들과 집단 외부의 사람들에게 다른 공감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하나의 집단이 집단 외부의 사람들에게 적대적으로 대하는 현상을 이해할 단서를 제공한다. 만약 여기에 집단의 비이성적 의사 결정과 만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집단이 비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모습을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정치 집단을 보면 그렇다. A 집단이 B 집단을 상대로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상상하자. A 집단의 한 구성원이 “우리 요구 5개를 관철시킬 수 있다면 협상을 시작하자”라고 말한다. 그러자 옆에 구성원이 “무슨 소리야! 10개는 돼야지”라며 소리를 높인다. 이에 다른 구성원이 “모두 아니면 안 돼!”라고 하자 다른 구성원은 “아니야. 협상도 필요 없어. 우리끼리 알아서 하자!”라며 주장한다.


이런 모습을 생각보다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그 바탕에는 집단내 구성원들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다른 구성원들에게 잘 보여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려는 욕심이 있다. 그래서 더 극단적인 주장을 하게 되며, 이는 실제로 의사 결정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친다. 타 집단에 대한 적개심이 이처럼 집단의 비이성적 의사 결정과 결부된다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유사 이래 믿고 싶지 않은 암흑기가 있었다. 20세기 이후만 보더라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일본의 난징 대학살, 미얀마의 로힝야족 학살 등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몇 년 전 한 덴마크 언론인의 SNS에 올라온, 팔레스타인 자치구를 폭격하는 광경을 불꽃놀이 즐기듯 구경하던 이스라엘인들의 사진도 큰 충격을 주었다. 집단학살 같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뇌과학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가능한 이유에는 인간의 뇌 작동방식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사악한 정치인의 구태의연한 지역감정 전략이 아직도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도 같은 연유에서이다. 그들은 집단에 속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간교하게 이용해 ‘우리’와 ‘저들’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도록 자극하여 민족주의, 더 작게는 지역주의, 혈연주의, 학연주의라는 테두리에 갇히게 만든다. 결국 ‘저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결해야 한다는 거짓 주장에 쉽게 현혹당한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폭격을 의자에 앉아 구경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이 사진을 올린 덴마크 언론인 알란 쇠렌슨은 “스데롯(지명) 극장. 가자지구 폭격을 구경하기 위해 산 위로 의자를 가져온 이스라엘 사람들. 폭격음이 들리면 박수를 친다.”라고 트윗에 올렸다. 화면 아래의 여성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다.


집단을 이루면 생존하는 데 있어 많은 장점이 생긴다. 현재 우리가 먹고사는데 필요한 모든 일들이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협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회를 이루어 살려고 한다. 그러나 ‘집단’이라는 테두리로 인해 타인에 대한 판단을 포함하여 우리의 생각과 느낌, 행동방식까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조종받게 되는 원치 않는 부작용도 떠안았다. 이에 대한 해결은 우리의 몫이다. 이제 우리는 집단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의무도 같이 짊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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