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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말은 뇌를 바꾼다.

사랑한다, 잘하고 있어, 예쁘다 — 그 한마디가 삶을 붙잡아준다.

by 이지애

6년 전 결혼식 날,

시어머니가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사랑한다.”


그때 나는 대부분 그렇듯 시어머니와 가깝지 않았다.

형식적인 관계였다.

어색했고,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가 뭔지 모르게 내 가슴에 쿵 하고 박혔다.


살다 보면 시어머니가 이해되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럴 때마다 떠오른다.
결혼식 날 들었던 그 말.
“사랑한다.”
한 마디가 관계를 붙잡아준다.



아이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엄마 오늘 예뻐요.”
아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없던 자신감이 생겼다.
거울을 봐도 별 차이를 모르겠는데,
그 말만으로 얼굴이 환해진 기분이 들었다.



남편은 늘 같은 말을 한다.
“잘하고 있어.”


특히 내가 죄책감에 시달릴 때.
아이에게 욱하고, 부모로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던져놓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 때.
그때 들리는 남편의 한 마디.
“잘하고 있어. 우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그 한 마디에 어리광 또는 투정 섞인 말을 한 두마디 더 하기는 하지만,

그 말이 숨통을 열어줬다.



반대의 경험도 있다.
아이의 유치원 담임 선생님과 대화하던 날.
나는 아이의 불안한 기질을 설명했다.
조금 더 맞춤형 대응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교사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거든요.

정 안되면 심리치료라도 받으세요.”

말 자체는 날카롭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을 무너졌다.
그 말은 칼처럼 날아와 마음에 박혔다.
내가 원하는 건 공감이었는데,
돌아온 건 차가운 매뉴얼이었다.




다정한 말을 들을 때와, 불친절한 말을 들을 때.
몸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다정한 말은 잔잔한 바다 같았다.
파도가 멎고, 호수가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
그 정도의 안정감.



불친절한 말은 정반대였다.
어깨와 턱에 긴장이 들어가고, 두통이 찾아왔다.
그날 하루는 무너진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뇌가 먼저 반응한다.

다정한 말을 들으면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세로토닌이 올라가고, 몸이 풀린다.
반대로 불친절한 말은 편도체를 자극한다.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고, 전두엽보다 먼저 반응한다.
그래서 말 한마디에 울고, 웃고, 무너지는 거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이호선 교수의 영상을 봤다.
사이좋은 부부로 사는 법.
아니, 이혼하지 않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던것 같다.



그 답은 “연기하라”였다.

당신 예뻐.
당신 멋있어.
당신 사랑해.


매일 진심일 수는 없다.
하지만 연기라도 해야 한다.
그게 부부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면서 알게 됐다.
말도 행동만큼 중요하다는 걸.
이쁘게 말하는 게 문제를 쉽게 풀어주기도 한다는 걸.



그럼에도 나는 가까운 사람에겐 다정한 말을 잘 못 한다.
낯간지럽다.
'굳이 뭐 그런 말을...' 하는 생각도 든다.
잘 챙겨주면 알겠지, 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와 부딪히고, 서로 언성이 높아졌다가도
내가 다정한 말을 먼저 건네면 금세 달라졌다.
“엄마도 미안해.”
“네가 힘들었구나.”
그 한 마디면 아이는 다시 수그러들었다.
말은 그렇게 즉각적인 효과를 가졌다.



남편의

“잘하고 있어”, “뭐든 해봐”라는

말은 내 우울감을 막아줬다.
좌절하는 순간에도 버티게 해줬다.
그때는 몰랐다.
힘들 땐 그 말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알겠다.

나는 그 다정함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그게 버팀목이었는데도.



다정한 말은 뇌에 변화를 일으킨다.
몸에도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관계를 지탱한다.

다정은 거창한 게 아니다.
“사랑한다.”
“예쁘다.”
“잘하고 있어.”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 어떤 다정한 말을 건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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