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낯선 이에게는 웃으면서, 가족에겐 왜 더 차가울까

by 이지애

아이 다섯 살 때였다.
어느 날 핸드폰을 들고 통화 흉내를 냈다.

“네네~ 아 네~~ 하하하하.”

나는 웃겼다. 동시에 당황했다.
그 목소리는 시어머니와 통화할 때의 나, 선생님과 통화할 때의 나였다.
아이는 그대로 베꼈을 뿐인데, 나는 그 순간 거울을 본 듯했다.
밖에서는 저렇게 다정하게 말하는데, 정작 아이에게는 어떤 말투를 쓰고 있었을까.



비슷한 장면이 또 있었다.
놀이터에서 다른 엄마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세상 교양 있고 차분한 엄마였다.
목소리 톤도 다르고, 말 끝도 부드러웠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달라졌다.
쌓여 있던 짜증과 화가 터져서, 아이와 남편에게 날선 말이 쏟아졌다.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어쩜 이렇게 순하고 완벽하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
공손하고 예의 바르고, 생활습관도 완벽한 아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집에서는 다르다.
억지를 쓰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이와 내가 같은 패턴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 Marriage Story(결혼 이야기) 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서로의 좋은 점을 나열한다.


“나는 그녀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이 좋다.”
“나는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게 좋다.”
편지 속에서 두 사람은 여전히 따뜻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집에 들어오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차가운 말을 던진다.



결정적인 장면.
“나는 매일 네가 죽는 상상을 해.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려서 죽는 상상. 그런데 넌 살아 있고, 여전히 나와 결혼해 있지.”



잔인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나도 집에서 남편에게, 아이에게 날선말들을 쏟아냈으니까.



브레네 브라운은 <마음 가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취약함을 가장 두려워하는 관계 앞에서 가면을 벗는다.”



취약함.
나는 이 단어가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읽는 내내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내 식으로 바꿔봤다.
취약함이란, 날것의 나를 보여주는 것.

밖에서는 가면을 쓰고 친절하다.
집에서는 가면을 벗고,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 - 불친절, 무뚝뚝함, 날카로움 - 을 드러낸다.



아이도 그렇다.

밖에서는 완벽한 아이, 집에서는 제멋대로인 아이.
그 역시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선 진짜 나로 있어도 괜찮다'는 무의식의 표현.



그런데 나는 또 질문이 생겼다.
“그럼 남편은? 그는 늘 한결같다. 어디서든 다정하다. 그건 내가 그의 안전기지가 아니라는 뜻일까?”



한동안 그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불꽃처럼 터지고 무너졌는데,
그는 한결같았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사람마다 취약함을 드러내는 방식이 다른 거다.
나는 취약함을 불친절로 드러내고,
남편은 취약함을 ‘한결같음’으로 감춘다.
오히려 안전기지를 지키기 위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정서적 안전지대'라고 부른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관계 앞에서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온다.



뇌과학적으로도 설명된다.
전두엽은 브레이크, 편도체는 가속페달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여기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긴장이 생긴다.
그래서 브레이크(전두엽)가 강하게 작동한다.
가속페달(편도체)이 밟히려 해도 제동이 걸려, 억지로라도 웃고 친절하게 구는 거다.

하지만 가족 앞에서는 다르다.
'여긴 안전하다'는 신호가 들어와 브레이크가 느슨해진다.
그 순간 가속페달이 먼저 밟히면서, 짜증과 날선 말이 제동 없이 튀어나온다.

한 마디로,

낯선 이 앞에서는 신호등이 빨간불이라 멈추는 상태.
가족 앞에서는 신호등이 파란불이라 그대로 달려버리는 상태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자책한다.
왜 하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불친절할까.
낯선 이에게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면서.

그러나 지금은 조금은 다르게 말할 수 있다.
가족에게 불친절한 건, 그들이 안전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다정이 사라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가면을 벗은 자리에서 다정은 더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낯선 이에게 웃는 건 쉽다.
사회적 가면만 쓰면 된다.

가족에게 다정해지는 건 어렵다.
가면을 벗어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연습한다.
낯선 이에게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다정한 말을 건네는 연습을.

keyword
월, 화, 수, 목 연재
이전 08화다정한 말은 뇌를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