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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다정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by 이지애

다정은 늘 잠깐 머물다 사라진다.


누군가가 내게 해준 말, 우연히 건네받은 친절, 그 순간의 따뜻한 표정.

분명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는데도 며칠이 지나면 흐려진다.

마치 바람이 스쳐 지나간 자리처럼 흔적이 옅어진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순간을 기록한다.

노트에, 사진으로, 혹은 영상으로. 기록이 된 다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꺼내 읽을 수 있고,

그때의 온도를 되살려 내일을 버티는 힘으로 만들 수 있다.



넷플릭스 다큐 Kindness Diaries에는 특별한 여행자가 등장한다.

그는 돈 대신 ‘낯선 이의 친절’만으로 세계를 일주한다.

잘 곳이 없으면 집을 내어주는 사람,

밥 한 끼를 나누는 사람,

낡은 오토바이를 고쳐주는 사람.

그가 만난 수많은 다정은 카메라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낯선 사람에게 건넨 친절이 어떻게 다음 사람에게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기록이 없었다면 ‘한순간의 에피소드’로 사라졌을 텐데,

남겨졌기에 수많은 이들이 영상을 통해 다시 그 따뜻함을 느낀다.



Orly Wahba의 TED 강연 Kindness Boomerang도 같은 맥락이다.

작은 다정이 기록될 때, 그 파급력은 배가된다.

누군가의 짧은 미소, 힘내라는 말, 문 앞에서 문을 잡아준 사소한 동작.

그냥 지나치면 끝이지만, 글이나 영상으로 남으면 제3자까지 그 다정의 수혜자가 된다.

다정은 순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흔적이 될 때 더 많은 사람에게 돌아온다.



나도 최근에 작은 실험을 하고 있다.

하루에 한 줄씩 ‘다정 기록’을 적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엄마 오늘 예뻐요”라고 말한 순간.

그때는 웃고 지나갔지만, 적어두니 다시 읽을 때마다 마음이 환해진다.


남편이 훈육으로 지쳐 있던 나에게 “잘했어”라고 말해줬던 그 순간도 적어두었다.

그냥 흘러갈 땐 힘든 하루 속 한 장면일 뿐이지만, 기록해두니 다시 나를 붙드는 힘이 된다.


반대로 상처 주는 말은 오래 남는다.

하지만 다정을 기록하면, 뇌는 상처보다 따뜻한 기억을 먼저 떠올리도록 훈련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사 일기 효과’ 와 닮았다.

매일 긍정적인 경험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우울감이 낮아지고, 자존감이 회복된다는 연구가 있다.


나는 아직 서툴다.

바쁜 날은 한 줄도 적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오늘의 다정’을 찾으려는 습관이 생겼다.

누가 내게 친절했는지,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다정을 건넸는지.

기록이 쌓일수록 작은 친절이 결코 작은 게 아님을 깨닫는다.

그것은 오늘을 버티게 하고,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세상엔 다정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기록은 영상이 되기도 하고,
노트 구석의 짧은 낙서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건 형식이 아니다.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려 한다.
오늘 내게 건네진 다정,
내가 건넨 다정을 놓치지 않고 적어두려 한다.

언젠가 이 기록이,
지쳐 있는 나를 살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붙잡아 줄 거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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