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정한 사람들의 말투에는 비밀이 있다.

말투 하나가 우리 집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by 이지애

남편이 내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아이 훈육이 또 엉켜버렸다고, 오늘도 소리부터 질렀다고, 나 스스로가 못나 보여서 괴롭다고.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딱 한 마디.

“잘했어.”



비꼬는 톤이 아니었다.
'당신은 당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어. 부족하게 느껴져도,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 말투였다. 설명이 아니라, 승인. 교정이 아니라, 수용.
나는 그 한 마디에 녹았다. 이상하게도, 그다음 문장들은 필요 없었다.



마셜 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에는 간단한 도식이 있다.

관찰 → 감정 → 욕구 → 요청.
누군가를 바꾸는 말이 아니라, 나와 너의 자리를 확인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방식은 단어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말투가 바뀌어야 한다.

비난의 말투는 상대의 방어를 즉시 끌어올린다.
비정한 말투는 상대의 문을 천천히 연다.
같은 문장이라도, 어떤 온도와 속도로 건네느냐가 전부를 바꾼다.



영화 <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에서 프레드 로저스(톰 행크스)는 늘 낮고 느린 톤으로 말한다.

서두르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고, 침묵을 기다린다.


그가 자주 말하던 문장.
“말로 꺼낼 수 있으면, 견뎌낼 수 있어요.”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건 기술이 아니라 태도였다.

다정한 톤, 느린 속도, 그리고 진짜로 듣는 사람의 얼굴.

나는 그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말투가 다정하면, 사람은 자기 안의 어려운 것을 꺼내놓는다.
꺼내놓아야 견딜 수 있으니까.



아이와 실험을 해봤다.
클라이밍 학원.

아이는 “친한 친구가 빠지면 나도 안 갈 거야”라고 버텼다.
예전의 나라면 “약속했잖아. 가야지.”, “왜 자꾸 핑계를 대?” 같은 말이 먼저 나갔을 거다.

이번에는 다르게 했다.

먼저 사실을 확인했다.
“친한 친구가 없으니까 가기 싫을 수 있지.”
공감부터 건넸다. 변명으로 받지 않고, 사실의 감정으로 받았다.

그리고 질문.
“근데 네가 거기서 자신 있게 잘했던 건 뭐였더라?”
아이는 대답했다.
나는 아이의 대답을 받아서 구체로 돌려줬다.
“맞아, 너 그걸 잘해. 엄마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엄마 저 오늘 그거 도전해볼래요!"

간단했다. 그리고 먹혔다.

아이는 씩씩하게 들어갔고, 수업을 마쳤다.


내가 한 건 설득이 아니라, 말의 순서를 바꾼 것뿐이었다.
공감 → 강점 상기 → 작은 시도.
말투는 낮고, 속도는 느리게. 판단은 빼고, 사실만.



이후로 나는 작은 훈련을 더했다.
상대가 말한 사실을 먼저 반복해주고(“친구가 양보를 안해준다고 화를내서 속상해서 울었구나”),
그 사실 위에 감정을 얹고(“그래서 속상했겠다”),
그 감정 뒤에 욕구를 가리키고(“가끔은 양보하기 싫은것도 있지, 울고싶은 날도 있지”),
마지막에 작은 요청을 얹는다(“너무 화가나고 속상할 땐 울음으로 표현해도 되고, 직접 말로 그 친구에게 이야기 해도 괜찮아”).



완벽하진 않다. 어떤 날은 실패한다.
그래도 원칙 하나는 지킨다. 아이가 흔들릴 때, 나도 같이 흔들리지 않기.
예전엔 아이 감정에 내 감정이 그대로 딸려갔다.
지금은 최대한 차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늦게 말하기를 연습한다.
말을 섣불리 내뱉지 않고, 속으로 한 번 더 돌려보고, 그다음에 말한다.



나는 하루에 하나씩 상황을 정해 대사 연습을 한다.

귀가 후 엉킨 숙제, 놀이터에서의 실랑이, 잠자기 전 양치질.
이전 훈육에서 내가 막혔던 장면을 하나 가져와, 말투를 바꿔본다.


“왜 또 그랬어?”를 “무슨 일 있었어?”로.
“지금 당장 해”를 “지금이 좋아, 아니면 5분 뒤가 좋아?”로.



사소하지만, 목소리의 높낮이와 속도를 먼저 낮추는 게 핵심이다.

뇌도 말투에 반응한다.
다정한 말투는 위협 경보(편도체)를 낮추고, 브레이크(전두엽)를 다시 붙여준다.
그 순간 옥시토신이 올라가고,'여긴 안전하다'는 감각이 생긴다.
안전하니까, 사람은 움직인다.
아이도, 어른도.



남편의 “잘했어”가 그랬다.

상대가 나를 고치려 들지 않을 때, 나는 오히려 바뀔 힘이 생겼다.

승인받은 사람만이 스스로를 교정한다.

다정한 말투는 그래서 효과적이다.

상대의 존엄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정한 말투의 비밀은 거창하지 않다.
사실에 기대어 말하기.
속도를 늦추기.
낮은 톤으로 묻기.
작은 시도를 제안하기.

나는 오늘도 연습 중이다.


실패한 날도 기록하고, 성공한 날은 더 짧게 기록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내게도 같은 말투를 쓴다.
“오늘도 잘했어. 완벽하진 않아도, 충분히.”

다정은 기술이 아니다. 습관이다.
말투부터 바꾸면, 마음은 따라온다.
마음이 따라오면, 행동도 바뀐다.
그리고 어느 날 알게 된다.
말투 하나가, 우리 집의 공기를 바꿔놓았다는 걸.

keyword
월, 화, 수, 목 연재
이전 09화낯선 이에게는 웃으면서, 가족에겐 왜 더 차가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