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스푼은 동전 하나의 크기지만, 나름대로의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한 스푼만큼의 용기도 그렇습니다. 그 작은 용기가 작은 변화의 몸짓을 그리고 그 몸짓은 더 큰 희망으로 연결될 것이니까요.
내담자
저는 미국 동부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주정부 자격을 지닌 전문 심리 상담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상담자의 일상은 꽤 무겁습니다. 삶의 어려움에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매일 만나 공감과 위로와 회복의 손길을 건네어야 합니다. 내담자(상담을 받는 사람들)의 눈에 드리운 그림자는 겪고 있는 고통의 크기와 무게를 드러냅니다. 얼굴에 잔뜩 패인 근심의 주름은 그 버거운 걸음의 시간을 짐작하게 합니다. 길게 내뱉는 한숨은 희망 없음을 표현하는 무언의 메시지입니다.
온 마음을 다한 따뜻한 눈빛으로 내담자를 바라봅니다. 그리곤 상담소의 문턱조차 높게 여겨졌을 내담자를 환영하고 그 찾아옴을 칭찬합니다. 상담을 신청하고 비용을 지불하며 차를 타고 찾아온 과정 뒤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상담을 통해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과 '내 문제를 드러내도 되나?'라는 수치심, 그리고 '혹시 잘못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 그렇기 때문에 상담의 첫 세션은 그 작은 용기를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까?
다양한 삶의 문제, 더 복잡한 원인
내담자들이 들려주는 삶의 문제는 너무나 다양합니다. 시간적으로는 과거에 얽혀 있는 것, 현재 일어난 일, 미래에 다가올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많은 내담자들은 현재의 어려움으로 찾아왔지만, 그 원인은 과거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통제하는 자신의 양육 스타일로 인해 발생하는 자녀와의 갈등의 문제로 찾아왔지만, 그 뒤에는 한 존재로 충분히 사랑받고 인정받지 못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로 인한 불안이 숨겨져 있는 경우입니다. 내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가에 대한 회의는 혼자 남겨짐에 대한 불안을 만듭니다. 이는 성인이 된 자신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이 불안을 감추려고 자신도 모르는 채 엄마 혹은 아빠라는 역할 가면을 씁니다. 그 가면을 쓰고 쉼 없이 통제하고 지시하며 '이렇게 해야 나는 좋은 부모야'라는 왜곡된 생각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정체성 결핍의 자리를 엄마, 아빠라는 역할로 채우는 것입니다. 이렇듯 문제의 현상과 원인은 시간을 이어가며 복잡하게 꼬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담자가 겪고 있는 문제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인간이 신체, 심리, 관계, 영적인 영역을 지닌 복합적 존재인 만큼 어려움도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신체 질병은 심리적인 문제를 쉽게 동반합니다. 가장 흔한 형태가 불안이나 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심리 문제 만이 아니라 관계 영역에서도 틀어짐이 확장됩니다. 치료비용이나 돌봄의 책임 소재 등으로 가족 간에 갈등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영향은 영적인 영역까지 이어져, 본인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대상을 원망하고 져버리게 되는 사례를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관계 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마음의 영역에서 어려움을 겪고, 이것이 길어지며 신체 질병으로 연결됩니다. 사춘기 자녀에게 심한 말을 듣거나, 배우자와의 오랜 갈등은 자괴감과 허무함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심리적 증상은 만성두통이나 소화불량, 불면과 같은 신체 증상으로 쉽게 연결됩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있는 삶의 어려움 속에서 내담자가 품고 사는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변할 수 있나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어디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경우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시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들을 다 사용했다고 믿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회의 가득한 질문 뒤에서도 여전히 소망을 봅니다. 비록 희미하다 할 지라도, 이런 지긋지긋한 삶의 문제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바람입니다.
두려움이라는 방해물
그러나 너무 안타깝게도 그 소망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족쇄에 채워져 무기력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됩니다. 그 족쇄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변화에 대한 걸음을 결단하고, 수많은 회복 도서를 읽고, 유튜브에서 강연을 들어도 며칠뿐입니다.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거나, 작은 불편한 경험을 하는 순간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곤 손에 들려 있는 자기 연민과 자책감만 만지작거립니다. 그리곤 "나를 이해하는 사람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내겐 아무도 없어요."라는 말과 함께 다시 스스로를 고통의 상자 안에 가두게 됩니다. 이렇듯 무거운 족쇄는 회복의 걸음에 큰 장애물입니다. 나는 이것을 과거의 잦은 실패 경험 그리고 그로 인한 회의감과 불신, 낮은 자기 자존감 (자기 수용과 자기 효능감), 그리고 바람이 빠져버린 회복의 탄력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들이 모이면 "나아짐", "회복됨"이라는 단어 앞에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듯 넘어져 고통받는 사람에게 무심코 던지는 날카로운 언어의 창이 있습니다.
"뭘 이런 문제로 힘들어해. 나는 더 괴로웠어."
"그땐 다 그랬어."
"좋아질 거야."
"시간이 약이야."
"기도할게."
"이렇게 해봐."
"네 의지가 약해서 그래."
"신앙을 좀 가져봐"
이런 말들은 정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몰아세우며 고통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서투른 충고와 위로에 다치게 되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손길을 뻗는 일을 주저하게 됩니다. 나의 한마디가 더 오랜 시간 그 사람을 고립시킬 수 있으니,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한 스푼의 용기
이런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용기입니다. 탱크 앞에 달려가 두 팔을 벌릴 만큼의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스푼의 용기. 그 정도의 용기면 시작하기에 충분합니다. 기어 다니기만 하던 아기가 갑자기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직 중심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엉덩방아를 찢거나, 앞으로 쿡 넘어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마치 일어나는 것이 숙명인양 다시 일어나려고 시도하는 것을 계속 반복합니다. 그리곤 이내 두 발로 일어서게 됩니다. 그 아이가 자라게 되면 부모와 놀이터를 가게 됩니다. 놀이터에 유아를 위한 아주 낮은 미끄럼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내려오는 일도 어린아이에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변에서 괜찮아 괜찮아 소리를 쳐도 엉덩이를 밀어 넣는 것이 보통 주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 한번 시도를 하게 되면, 그 이후에는 집에 가자는 부모의 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즐거워합니다. 마찬가지로, 회복과 성장의 족쇄인 그 두려움 앞에서도 작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한 스푼의 용기는 작은 계단을 오르는 연습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황을 기준으로 무엇인가 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이상적 상황을 열 계단, 스무 계단 뒤에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곤 각 계단에 실천 가능한 작은 과제들을 붙여 넣습니다. 첫 계단은 아주 작고 쉬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처 주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대응하고 싶어 하는 것이 목표라면, 그 첫 계단은 그 사람에게 되받아 칠 독하고 당당한 말을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첫 계단은, 그 상처로 인해 자신에게 쌓여있는 부정적 감정과 영향을 탐색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기분이 나빴다는 추상적인 표현 대신, 수치심, 불쾌감, 열등감, 자괴감, 상실감 등의 자세한 감정의 이름표를 붙여보는 것입니다. 이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월한 작업일 수 있습니다. 단 감정의 종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감정 리스트를 찾아서 고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하다 보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라는 억울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 내가 참 아팠구나'라는 따뜻한 동정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곤 다음 걸음을 걷고 싶은 좀 더 탄탄한 동기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것이 한 스푼의 용기가 주는 힘입니다.
한 스푼의 용기는 과거의 증거 찾기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스스로 한 번이라도 용기를 내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아기였고, 기었다가 일어나서 걸었던 경험이 있다면 일생에 한 번도 용기를 낸 적이 없다는 표현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상담에 찾아왔다면, 그게 이미 용기를 낸 일입니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낸 것이 용기일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힘들었음에도 남에게 손을 내밀어 도왔던 경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용기입니다. 그 용기냄이 미약했었다고 할 지라도, 적어도 그것은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담자분들께 자주 들려드리는 이야기는 "당신의 과거가 당신에게 용기가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종이를 펴고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용기를 내었던 경험들을 간단한 단어들로 표현하며 적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보잘것없고, 우스운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주저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용기의 경험이라는 증거 찾기를 하다 보면 마음 한편이 뿌듯해질 것입니다. 내가 다 망쳤던 것은 아니구나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곤 나에게도 희망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한 자락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한 스푼의 용기가 주는 힘입니다.
한 스푼의 용기는 누군가 옆에 있어줄 때 만들 수 있습니다. 작은 계단을 오르는 일 조차 혼자 할 수 없다면,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상담자를 찾아보는 등 주변에 안전한 관계에 손을 내미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담자가 들려주는 위로와 공감의 언어들에 자신을 개방하는 연습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아플 수 있습니다."
"많이 애쓴 것이 사실입니다."
"조금 더뎌도 괜찮습니다."
"눈물이 날 땐, 울기로 해요."
"어려움의 크기는 주관적인 것이랍니다. 내가 느끼는 어려움의 크기가, 아픔의 크기를 결정하는 거죠."
"몇 걸음 같이 걸어드릴게요."
어떤 내담자 분들은 남자에게 칭찬을 처음 받아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괜찮다는 말이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상담자의 얼굴과 말투가 떠올라서 참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상담 시간에 다 말해야지 하며 참고 기다렸다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이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한 스푼의 용기가 주는 힘입니다.
낯설지 않은 희망
작은 용기냄이 작은 결과물을 그리고 그 결과물은 변화의 동기를, 그리고 그 동기는 좀 더 크고 지속되는 용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곤 두 번째 계단, 세 번째 계단을 오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도전이 되는 일을 조금 더 오래 버티며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한 달 전, 두 달 전, 석 달 전과는 사뭇 다른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은 티스푼을 볼 때마다 한 스푼의 용기를 떠올리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일부터 다시 시도해 보는 겁니다. 희망이란 단어가 낯설어지지 않을 때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