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를 심어 놓은 단어 #3: New Chapter

후회와 자책을 넘어서고 싶을 때

by Better Me 김진세

위로를 심어 놓은 단어: New Chapter

드라마 다음 편이 기대되는 건 현재 주인공의 갈등이 어떻게 풀릴지 궁금해서입니다. 무엇인가 다른 스토리가 쓰일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한 장만 넘기면 새로운 쳅터를 쓸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스케치북 한 장을 넘겨주면 환하게 미소 짓습니다. 인생의 하얀 종이가 우리에게도 위안이 됩니다.



지긋지긋한 후회

상담자가 반드시 익숙해져야만 하는 삶의 소재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후회'입니다. 너무나 많은 내담자 분들이 후회를 가슴에 담고 상담소에 찾아옵니다. "그때 제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 했어요",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어요", "그건 부당한 일이라고 저항했어야 했어요", "경찰에 신고를 했어야 했나 봐요", "다시 제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걸 그랬어요", "그 사람이랑 결혼하지 말았어야 해요", "아이를 데리고 나왔어야 해요."등 많은 후회를 마주해야 합니다. 후회를 듣고 있으면 안타까움에 가슴이 아픕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수를 써도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후회 옆에 자석처럼 붙어 있는 지독한 자책이 더 큰 이유입니다. 그렇게 힘든 순간을 겪었는데,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잘 대응하지 못한 게 자신을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한 경우는 자신을 학대하며 저주하는 말을 퍼붓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신이 그 문제의 원인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자책합니다.


저는 인생을 다 망친 것 같아요


무뎌짐

후회가 오래되면, 마음 한편 깊숙한 곳에서 곪게 됩니다. 곪은 상처는 감정의 회로를 무디게 만듭니다. 스스로의 감정에도 타인의 감정에도 관심이 줄어듭니다. 반면 불편하고 예민한 일들이 많아지며, 짜증과 화는 점점 늘어갑니다. 후회할 일들이 잦아지면, 안에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쌓이면 다른 것을 담을 공간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니 행복한 일을 기대할 자리도, 미래를 꿈꿀 자리도 사라집니다. 그리곤 "저는 인생을 다 망친 것 같아요",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후회가 현실의 행복을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갉아먹습니다. 후회의 짐은 무겁습니다. 다 짊어지고는 삶의 과제를 온전히 수행하며 계단을 오를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찾아온 내담자를 돕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가슴으로 느껴진 이후엔 더 조심스럽습니다. 당신의 집착이 문제라고 다 내려놓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통의 크기를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 같습니다. 지난 일이니 다 잊으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이 내려앉는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냉철하게 느껴집니다. 후회할 시간에 미래를 계획하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건널 수 없을 만큼 큰 강 너머에 서서 외치는 듯, 정서적 거리감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또 후회할 일이 생길 거라 책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을 만큼 화가 납니다. "네가 이래서 그랬겠지", "그 사람이 그래서 그랬겠지"하며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이 떨어져 '너 잘났다'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지시하는 사람 같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며 다 좋아질 꺼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희망고문을 하는 듯 느껴지며 너무 답답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여겨집니다.




New Chapter 쓰기

이렇듯 후회를 끌어안고 인생을 다 망친 듯 절망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상담에서 제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공감입니다. 공감이란 그 사람과 함께 그 정서에 머물러 주는 것을 말합니다. 후회하며 자책하는 사람에게 공감은 그 일은 후회가 되는 일이 맞다는, 그리고 자책이 되겠다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결국 지속적인 공감은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정서적인 긴장을 풀어줍니다. 그리고 나면, 남의 조언을 담을 공간도 생기고, 무언가 해볼 수 있는 용기도 생깁니다.


저는 이런 내담자의 작은 변화가 느껴질 때야 비로소 다음 걸음을 제안합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인생의 페이지'를 한 장만 넘겨서 new chapter를 함께 쓰자'라고 제안합니다. 왠지 그럴싸해 보이는 비유입니다. 내담자 분들은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더 듣고 싶어 합니다. new chapter를 쓴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 삶의 작가입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 살지 않겠다, 이제는 힘을 되찾아 오겠다는 결단입니다. 이제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중간에 포기했던 일부터, 묵혀 놓았던 꿈까지 다 꺼내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젠 내가 당당히 작가가 되어서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모습, 가고 싶은 곳을 써내려 갈 것입니다. 내 책에 빈 종이가 몇 장이 남았는지 세어보면 지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과거는 당신 책의 일부이기에 찢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후회되는 과거를 떼어내려 하거나, 지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기억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후회의 기억을 꺼내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이를 반추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자유로움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끌어안아 수용하며 돌봐주어야 합니다. "만약 나를 위로해줄 사람이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면"이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과거가 주는 긍정적 의미 찾기에 매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은 나를 구박하고, 책망하고, 저주하는 일을 멈추는 것이 먼저입니다.

"한 장만 넘기면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습니다" 과거에 매여있는 날이 많아질수록,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 시도하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마치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두려움을 감추려 많은 변명거리를 앞세웁니다. 과거가 해결이 되어야 한다, 나는 자존감이 낮아서 안된다, 준비가 덜 되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 이기적으로 보일 거다, 이제는 이게 편하다, 이 나이에 해서 뭐하냐. 나름대로 납득이 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못합니다. 한 장을 넘긴다는 것은 내 생각 속에서 만큼 크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다 지긋지긋해. 그냥 내 맘대로 살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툭 내뱉는 이 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의지를 내면 안도감을 얻습니다. 나쁘지 않은 거래입니다.

"이렇게 기록된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읽힙니다" 역기능적인 가족에서 자란 사람은 더 이상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가족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나의 노력은 좋은 엄마, 좋은 아내라는 인정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희생을 했는데, 그들은 통제를 받았다고 여깁니다. 이제 다른 방향으로 걸을 때입니다. "내 말을 잘 들으면 된다고 가르치면, 제일 잘되어도 나처럼 된다"는 말을 자녀 양육 세미나에서 많이 합니다. 차라리 멋지고, 당당하고, 멈추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기억됩니다. 내 삶의 일지를 펴보며 나를 떠올릴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나. 그것이 한 장을 넘겨 쓸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마음 한편에 '그럼 한번 해볼까'하는 동기가 생깁니다.

"아직 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숨을 쉬는 한 사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이미 삶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의지를 상실한 상황에서는 쓴다는 표현보다는 쓰이고 있다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쓰던, 쓰이던 삶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전 상처 쳅터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넘겨서 새로운 쳅터를 시작하던지 그 차이뿐입니다. 아직은 새로운 이야기를 쓸 힘이 남아 있습니다. TV를 보며 누군가를 부러워할 수 있으면, 유튜브 강연을 보며 새 정보와 지식을 들을 수 있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고 있다면 나에겐 아직 새로운 쳅터를 써 내려갈 힘이 있습니다. 이 말을 꼭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삶을 포기하지 않은 한, 힘은 남아 있습니다.


준비가 필요한 글쓰기

'새롭게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우리를 주저앉힙니다. 이젠 '그럼 어떻게 쓸까'로 아예 생각의 시작을 바꿔봅시다. 준비 없이 쓰이던 과거의 쳅터들에 후회가 가득하니, 이번엔 좀 다르게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종이를 한 장 펴고 이건 내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펜을 들고는 이것은 내 의지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주인공인 나를 묘사하는 형용사 10개를 찾아 기록해 봅니다. 그 후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약점 5개, 강점 5개를 찾습니다. 나를 아주 잘 아는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도 물어봅니다. 최근에 미소 지었던 일, 부러웠던 것, 마음속의 숙제, 가보고 싶은 곳, 하고 싶었던 일, 먹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받고 싶은 선물, 그리고 내 비석에 기록될 말까지 적어봅니다. 그리곤 내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만 원이 있다면, 5만 원이 있다면, 10만 원이 있다면, 50만 원이 있다면, 100만 원이 있다면, 500만 원이 있다면, 1000만 원이 있다면 뭘 할지를 적어봅니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이라면 더 큰 액수까지도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의미'라는 단어를 하나 적고, 동그라미를 칩니다. 그리곤 마인드 맵을 하듯 가지를 쳐서 이어나가며 나에게 의미가 있는 일 10가지를 적어봅니다. 이렇게 하면 일단 글 소재 준비는 대충 끝났습니다. 이제 가로로 선을 하나 길게 긋고, 1년, 3년, 5년, 10년을 표시합니다. 내가 쓸 새로운 삶의 이야기가 진행될 타임라인입니다. 그 선 위에 미리 준비한 소망과 소재들을 얹어봅니다.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 작업이 끝이 아닙니다. 과거에서 배운 것처럼, 방해물을 예측해야 합니다. 모르고 당하는 것과 알고 당하는 것의 그 영향의 차이가 너무 큽니다. 그러니 그 타임라인 위에 예상되는 방해물들도 기록합시다. 그 방해물 옆에는 극복할 수 있을 방안을 같이 적어 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새로운 쳅터의 아우트라인이 완성이 되었습니다.



다행이다

이렇게 준비를 차근차근하셨으면, 이젠 제법 든든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그러니 그 종이 한 구석에 스마일 표를 하나 그리고 '잘했어'라고 적어 스스로를 칭찬해주기로 합시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합니다. 그리고 삶의 한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깁니다. 그리고 첫 단어를 씁시다: "다행이다." 저는 여러분의 새로운 인생의 쳅터 쓰기를 응원합니다. 얼굴도 삶도 모르지만, 이 글을 읽고 시작하셨다면 응원의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여러분 삶에 적어도 한 사람은 있는 겁니다. 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작은 지지가 힘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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