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마음이 머무는 이유
모든 것이 전산화되어 유통 및 저장되는 요즘, 컴퓨터 공학을 전공으로 삼고 있지만 여전히 나의 마음은 종이에 적힌 기록들로 향한다. 출력된 네 컷 사진과 영화 티켓, 언젠가 짝에게 받았던 쪽지, 오래된 다이어리 등 사실은 종이에 기록된 것들이 들춰보기도 쉽고, 더 오래 보존되는 경우도 많다. 이번 글은 종이와 기록, 그곳에 깃든 나의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먼저 종이로 읽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전자책과 종이책 모두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이긴 하지만, 전자책에 대한 선호도가 종이책을 앞지른 적은 한 번도 없다. 간편한 휴대성, 장소의 제약으로부터의 탈피, 비용 등 많은 것들에 있어 전자책의 장점이 많지만, 왜인지 전자책을 읽으면 조금 아쉬운 경우가 많다. 종이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 흐름이 시각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책의 시작과 끝이 두께라는 지표로 명확히 드러나고, 내용의 전개는 좌→우로 이어지는 시선의 흐름에 따라 이어진다. 나에게는 그런 시각적인 명확성이 책을 읽을 때 내용을 따라가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또 밑줄과 메모를 병행하며 독서를 하는 나에게 수기로 기록하는 것의 편의성을 따라갈 수 있는 전자기기는 없다. 필기를 하다보면 렉이 걸리거나 멋대로 페이지가 넘어가는 전자책과는 달리 종이책은 그런 오류들로부터 자유롭다. 언젠가 책을 잔뜩 쌓아둘 충분한 공간이 있는 집에 살게된다면, 꼬옥 좋아하는 책들로 방을 가득 채우고 싶다.
종이에 기록을 남기는 것을 좋아한다. 편지부터 일기, 필기까지 컴퓨터와 아이패드 같이 편리한 기기들이 많음에도 늘 종이를 찾게된다. 가장 큰 이유는 처음 언급한 보존의 지속성인데, 의외로 종이는 불에 타지만 않으면 외장하드보다도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다. 외장하드나 데이터센터도 불에 취약한 것은 마찬가지이니, 공간적 한계만 없다면 종이만한 기록물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오래된 일기와 편지를 들춰보는 것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곳엔 아직도 몇 해 전 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에 친구와 주고받던 쪽지, 좋아서 다섯번씩 본 영화의 티켓, 그리고 치열하게 살던 시절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나의 일기는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어서 그 때의 감정과 다짐을 위주로 쓰는 편인데, 과거의 내가 했던 치기 어린 생각들이 기특할 때가 많다. 언젠가 미래의 내가 돌이켜 볼 추억들을 남긴다는 생각으로 일기를 써내려가는 시간이 좋다. 필사도 많이 하는 편인데, 좋아하는 문장이 영원히 나의 필사노트에 남아 있는 게 좋은 것 같다. 책은 한 번 읽고 덮어버리면 다시 펼쳐보기가 쉽지 않지만, 필사노트에 적은 문장들은 노트를 펼칠 때 마다 한 번씩 더 읽게 된다. 기록의 힘을 배로 만들어주는 종이, 그곳에 사각사각 남겨보는 현재의 이야기가 언젠가 더 큰 힘이 되기를 바란다.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로 종이에 남은 기록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특히 사진에 관한 이야긴데, 요즘은 클라우드니 외장하드니 사진을 잃어버리기가 더 어렵기는 해도, 출력된 사진 만큼 자주 바라보게 되는 것이 없다. 네컷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사진 부스가 생긴 것이 정말 좋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은 멀어진 친구들과의 추억도, 혼자 가서 기록하던 나의 모습도, 갤러리에 저장된 원본보다 출력되어 낡아가는 사진을 앨범에 모으다 보면 어느새 앨범은 나의 청춘이 되어있다. 수십번 찍어 하나 삭제하는 것 정도는 손쉬운 카메라나 스마트폰보다도, 조금 못나와도 아껴 쓴 필름에 담긴 폴라로이드 사진이 더 소중한 것처럼, 종이는 나에게 아끼는 것이다. 종이에 눌러 쓴 서투른 편지도, 고칠 틈도 없이 빼곡히 써내려가던 나의 생각과 감정도 모두 영원히 곁에 남겨두고 아끼고 싶다.
쓰다보니 종이의 장점에 대해 설파하는 글이 된 것 같다. 최대한 나의 솔직한 생각을 떠오르는대로 써내려가는 것이 목표인데, 늘 쉽지 않은 것 같다. 오늘도 꾸준히 기록하기를 다짐하며, 오늘의 얇은 종이가 오늘의 나를 가장 잘 기억하는 매체가 되어있을 미래를 그리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