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포도는 참 좋은 포도였으니까.
당신이랑 가면 분명 즐거울 것 같아서, 당신 몰래 사두었던 두 장의 전시 티켓.
혹 당신의 취향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했었지만, 역시나 너무 잘 한 선택이었어요.
당신과 함께 본 전시가 얼마나 즐거웠던지 나는 처음 보는 장소에 소풍을 간 아이만큼이나
그 순간이 너무 신나고 행복했어요.
우리는 작품을 한 점 한 점 보면서
"이건 비틀스네요. 한 명이 맨발이에요. "
"작업을 하는 방식이 너무 좋네요. "
"디테일이 어떻게 저렇지? "
"이 작품은 어떻게 작업했을까요? "
"이건 아마 밤부터 석양까지 인가 봐요. "
같은 작품에 대한 감탄과 감상부터
"정말 집에 걸어두고 싶다. "
"떼서 가져갈까요? "
"제가 들고 튈 테니까 00 씨가 바람잡이 해줘요. "
같은 시답잖은 농담을 킥킥대며 주고받기도 하고
작가가 얼마나 기발한지를 이야기하면서 어떤 작품에서는 그의 작업방식을 추측해보기도 했죠.
서로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들을 서로에게 알려주기도 하고요.
우리는 말 그대로 전시에 오롯이 집중한 시간을 보냈어요. 서로의 감상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요.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요. 꿈같았을 정도로요. 내게는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고요.
여태까지 내 주변에는 그런 전시에 큰 흥미가 없거나, 유명 전시의 (전시를 보는 자신의) 사진을 찍으러 가는 사람뿐이었거든요.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누군가 의견을 던지면 한쪽이 "오 그렇네요! "하며 공감하고, 작품의 의도나 의미 따위를 함께 고민도 해보는 그 시간들은 제게 너무 값지고 소중했어요.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겁고, 나의 이야기를 듣는 당신의 반응을 보는 것도 즐거웠어요.
그날은 내 생일이었잖아요? 전시관람을 마치고 방문한 전시 굿즈샵에서 내가 이쁘다고 하는 것마다 사주겠다며 냅다 집어버리는 당신 때문에 나는 구경하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어요.
누군가와 함께 본 전시 중에 가장 의미 있었고 즐겁고 유쾌하고 행복한 기억이었어요.
(아마 혼자 본 전시까지 다 합쳐도요. )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당신과 함께한 날 중 그렇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요.
사실 그날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갔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막상 만나고 보니 너무 즐거워서, 당신이 아직도 내게 최고의 개그맨인 것 같아서 무서워졌어요. 당신을 아직 꽤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버려서요.
그날도 언제나 그랬듯 당신이 뭘 해도,
당신과 어떤 걸 해도 나는 웃기 바빴어요.
해가 지는 게 야속할 정도로요.
왜 항상 당신은 함께하는 시간들을 이렇게나 행복하게 만들어버리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했어요.
당신이랑 있으면 어디를 갈지, 뭘 먹을지,
고민하는 시간까지 즐거울 일인지,
식당 찾기를 빙자한 산책을 하다가 들어간 식당은 또 왜 이리 맛있는지,
그 안에서 한 대화들은 또 왜 이리 즐거운지.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점점 축축하고 무거워졌어요.
해는 이미 져버렸지만 헤어지기 아쉬웠던 우리는 자리를 옮겨 술 한잔을 하기로 했죠.
그렇게 들어간 작은 술집에서 그동안 잘 보이려는 마음에, 혹은 자존심에 차마 하지 못했던 각자의 사정을 털어놓았던 그때, 점점 선명해지는 마지막의 형태에 나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고 당신은 그런 내가 불편할까 애써 눈을 돌려 다른 곳을 보고 있었죠.
서로의 솔직한 생각을 들으며 우리는 정말 그만해야겠다는 결론을 지었어요. 우리를 위해서.
서로에게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면서요.
내가 탄 버스가 떠날 때까지 내게 손을 흔들어주던 당신 모습에, 마지막 순간까지 꽤 웃겼던 행동들에 나는 끝끝내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버스를 기다리며 우리가 포옹을 했던 그때, 당신 품에 안긴 채 울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눈물에는 참 잘 맞는 전시 메이트를 찾자마자 작별을 해야 한다는 슬픔도 조금은 있었을까요?... 는 농담입니다. )
아무튼, 우리가 그날 했던 약속처럼 우리가 제법 괜찮은 사람일 때 다시 연락해요.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은 없어도 서로에 대한 확신은 있었잖아요.
이 사람이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 잘 될 거라는 확신. 이 사람은 결국 힘들고 어두운 지금을 잘 견뎌낼 거라는 확신.
나는 당신의 확신을 안고 나아갈 테니 당신은 나의 확신으로 나아가주세요.
내 작은 바람입니다.
PS.
눈치를 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참았던 순간들이 몇 번 있었어요.
첫 번째 이유는 당신의 전 연인이 당신에게 꿈이 아닌 안정적 직장을 갖길 바랐다는 것 때문이었어요.
사랑을 위해 기꺼이 꿈을 뒤로하고 많이 힘들어했다는 당신이 슬펐고 안쓰러웠어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이 밉기도 했고요. 한편으로는 당신의 꿈을 응원하면서도 함께하지 못하는 나도 좀 안쓰러웠고요.
훗날 당신의 옆에 있게 될 사람은 꼭 (나처럼) 당신을 이루는 모든 것이 당신이어서 사랑해 주는 사람이길 진심으로 바라요.
당신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포도밭의 여우는 결국 져버렸어요.
포도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날,
그 포도가 참 좋은 포도라는 게 너무 확실해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