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이후의 삶이 일생을 좌우한다

초역 채근담 시간의 언 1화

by 이청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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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 채근담 시간의 언어 연재 1화에서 바라보는

중년 이후의 삶이 일생을 좌우한다를 들여다보면,

젊은 시절 마음 내키는 대로 놀며

제 아무리 시끌벅적하게 산 사람도

나이가 들어 일정 직업을 갖고 견실하게 생활하면

과거의 들썩이던 삶은 상쇄되어 사라지고,

비록 젊을 때 절도를 지키던 사람도

만년에 탐욕에 빠지거나 도리에 어긋나게 살면

그제까지 성실히 살아온 인생을 헛되게 삶과 같으니

후반생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사람의 일생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무릇 사람의 인생은 일생이라

두 번이나 세 번이 없음은 당연하다.

그런 연유로 한번뿐이기에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그것은 신중하다는 것이요

그것은 인생 전체를 다 둘러보고 난 후에 평가를 한다는

것과 같으리라.


그러고 보면 그의 모든 순간에 걸쳐서 남의 입길에서

무어라 무어라 외워 대는 소리가 있을 것이관데,

따지고 보면 사람은 그 시초를 아는 이가 적고

알아도 그 끝이 더욱 임팩트하게 느끼는 것이

그 가중치가 플러스이건 마이너스이건 그 끝을

본다는 것에서 보면 현실적으로도 또 사실적으로도

그 말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인지가 제일 중요하다

하겠다.


결국 그것으로, 그 인생 후반부로 인생 전체를

관조하고 그 사람을 평가함은 일견 당연키도 하고

한편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또한 죽는 순간에 어느 자리에서 어떤 사람들과

사에에서 눈을 감느냐는 그 당사자의 마음어림에서

짚힘이 있다 쳐도, 그 당사자 역시 끝에 죽는 순간에

기쁜지, 즐거운지, 슬픈지가 중요하지 기억도 안나는

태어날 때의 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초역 채근담 열한 번째 글이랄지, 초역 채근담 시간의 언어

1화랄지 하는 "중년 이후의 삶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말은 참으로 그럴싸하다는 말을 해야 할 수밖에 없으리라.


불현듯

기독교의 원죄의식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기실 기독교를 믿는 자 아닌 가운데 더러,

"하늘에서 무엇을 내게 준 게 있다고 가만있는

사람을 쌩 처음 시작부터 죄인이라 하오?"

물어볼 이도 더럿 있건만,

기독교에서 원죄의식을 설파하는 것에 전연

생각 없이 들으면 발끈하기도 할 참이지만

또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고기맛만

태어나면서부터 봐왔다면 어찌 한우의 어느

부위가 더 맛남은 알아도 채소만 수십 년 먹다가

고기라는 것을 처음 맛본 사람의 입맛만큼

진득하게 또 경탄하며 그 맛을 알고 표현하리오?


원죄의식을 누가 이야기 함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혹은 길 가다 누가 나의 방향으로 욕을 함이 있다 쳐도

그것을 내가 들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기국과 도량을 넓힌 마음의 안에서 어떻게

용해하고 받아들여 이해하고 생각을 도출하느냐에

달린 것이 중요치 아니할까?


그러고 중년 이후의 삶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초역 채근담은 일찍이 옛날 중국사람의 말이요

기독교의 생각은 저 멀리 서양의 종교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참으로 내가 들어서 이해하고

나의 몸에 이롭게 살펴 펼쳐낼 방도가 있다면

그것이 더욱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윈죄를 내가 심히 깊이 믿든 믿지 않든,

혹은 원죄가 내게 실로 있었든 있었지 않든 간에

내가 이 말을 들음으로 스스로 언행에 주의하고

겸손하게 살라고 하는 말로 변환하여 듣는 사람은

그야말로 그 말의 모습이 어떠하건 그 말로 내가

잘 살아가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됨이 충분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듣고 내가 이해가 되고,

그 말을 곱씹어 봄에 그 실행도 할 법한 맘이 들고,

그 말을 금과옥조로 삼아도 내가 타인에게 위해가

되지 않고, 타인이 나의 언행에 손가락질을 안 함만

있다는 판단이 들면 그 말은 새겨들을만하고 따라

실행할 값어치 있는 것이라고 결론 내어야만 하겠다.


그렇게 잠시 눈감고 사유하고 들여다본 이 초역 채근담

시간의 언어 1화의 글은 보기에 자못 어떠신가?


그 어떤 독자분이라도 실로 읽어봄에, 곧이어 장쾌히

"익숙하여 행하는 자는 그 겉으로 능숙하다 하지만

알고 행하고 깊이 느끼어 행하는 자에게는 성찰과

원숙이 있다"는 말에 절로 부합된다 느끼시지 않을런가?


쇠는 단김에 쳐야 단단한 강철 농기구도 강철 식기도 되는 바

사람 역시 소용됨이 있는 강인하고 의지 있는 진짜

사람으로 일생이자 인생을 살아봄에는 느낌이 있을 때,

실행하고 실천함이 참으로 옳다는 생각이 드는 이 시점에

독자께서는 이제 이 초역 채근담 시간의 언어 첫 번째 구절에서

눈을 비로소 떼는 시각에 들어 홀연히 의자에서 일어나

밖을 보면서 내일은 중년 이후의 삶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하는데

어떤 중년을 대비하여 지금 청소년, 청년 시기를 보낼지

또 어떤 중년을 살아보려고 지금의 중년을 준비해야 하는지의

중년이 되고, 또또 지나온 중년에 못한 것 중 의미 있고 살아볼 만한

가치 있는 것을 발굴하여 지금의 장노년에 실행해 보는 사람이

되어 봄직 하지 아니할까?


이 초역 채근담 시간의 언어 첫 번째 글의 끝자락 언덕에 서서

보노니, 필자는 다만 앵무새, 이 초역 채근담의 구절을

사람들에게 번역하여 한글로 알리는 사람임이 분명하다고

느끼고 있을 제, 필자는 비로소 이 브런치의 아침에

또다시 새로운 오늘의 태양이 비치는 오전이 되었음을

온몸에 느껴도 보는 중이라 하겠다. 그렇게 따뜻한 햇빛

받듯이 읽으신 독자께서도 인생의 빛 받음이 있으시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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