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함에 대한 하나의 응답
초역 채근담의 첫번째 페이지를 열어본다.
부끄럽지 않으며 정직하게 산 사람은 일시적인
출세의 길에 벗어나기도 불우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며
권력자에 아첨하는 자는 살아있는 동안
대접받고 득의양양하지만 그것이 오래 이어가지
못하고 영원히 역사속에 박제되어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말한다.
"죽고 난 뒤에 다 무슨 소용이냐"라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다분히 아첨자의 손가락질 당함을 들어
가히 통쾌하고 상쾌하니 이를 경계로 삼아
정직한 사람의 길을
따르라 말함이 능히 쉬운길일까?
또한
말함을 넘어선 생각의 깊음에서 듣는 사람 역시
정직하게 산 사람을 따라가는 행동이 납득되고
하고 싶은 행동이 될수 있을런가?
우리는 이 앞에 멈춘다.
"차라리 큰 도적이 된다면, 도적의 인생도 장쾌하리요"
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
장발장의 책이 높여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이해시키고 납득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하루종일을 생각해보기로 밤도 낮도 잊고 생각해도
생각이 참으로 좋다고는 생각할 수 있으나,
어떤 이는 인류 역사의 4대성인의 이야기를 들음에도
조금도 개전의 정을 보아올 사람이 없음도 있음을 안다.
그럼에 정직하게 사는 것은 '선택의 문제'요
아첨자로 사는 것은 '기질의 문제'라고 본다.
목안에 이물감을 느끼는 자는 밥덩이를 넘길수가 없다.
지금 어느 행위에 서서 마음속에 이물감이 느껴지는 사람은
그 행동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
결국 정직하지 않으나 아첨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 세상이치요
아첨자로 살지만 그 안에서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하며
그들을 돕는 사람도 분명 있음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인간적인 면모에서 일본인이지만
항왜로 활약한 사람은 따뜻한 사람의 마음을 가진 인간향이라고
할것인가, 아니면 조국을 배신한 역적이라고 할 것인가?
더 나아가
부모 중 하나는 한국인이요 남은 부모 중 하나는 일본인이라면
그는 한국인에게 사죄하며 살아야 하는것인가 아니면
일본인으로 당연한 애국적 결단이었다고 일제강점기를 돌아볼
것인가.
인간세상은 또 세상살이는
우리가 초등학교때 읽은 것처럼 그렇게 장쾌하고 상쾌하게
악인은 무조건 악인이요. 선인은 무조건 선인이며
칼로 두부짜르듯 무엇은 맞고 무엇은 무조건 틀린
세상이 아니다.
그러나 마치 현미경을 너무 들여다보다가
눈이 어릿해짐에
한발 물러나 뒤의 등받이에 기대어 천장한번 올려다보는
사람처럼이나 크게 보면
인간이란 모름지기 담담함 것이 중요하다.
어떤 생각을 뱉어서 말했다면
어떤 행동을 일러서 했다면
그 다음은 담담히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반대편의 비난에 담담하고 받아들일 준비
그리고 상 받을 일이 있다면 받고,
벌 받을 일이 있다면 언젠가 벌이 내릴것을
담담하게 생각하는 자세 그런 것들이 있다면
필자는 그것으로 족하며,
그 정도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혹은 중간인이든
가져야 하는 자세라고 생각을 한다.
한개의 예쁘게 생긴 케잌을 손에 넣은 후
그 케잌이 세상에 한개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
그 케잌을 먹는 기쁨을 느낄때는 케잌이 망가짐을 받아들이고
그 케잌을 보는 기쁨을 느끼려면 케잌의 맛을 볼수 없음을
이해하고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
운세나 형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함이 이와 같다.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산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사실 악한자나 아첨자가 어떤 인생을 걷고
어떤 과보를 얻을지 도외시 하게 된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도 백살남짓은 모자란 시간이다.
그래서
공자님은 귀신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사람의 일도 모르는데 귀신의 일을 어찌알랴?"
하시지 않았던가?
진짜 모르는 무지의 차원이 아니라
알필요도 없고 알기에는 지금의 나의 인생이 더
치열하게 만들어가고 나의 신념과 판단과
선택대로 살기에도 바쁜 다른 선상 위에
놓인 뫼비우스의 띠 아닐까?
그러고 돌아보면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산다
는 초역 채근담의 이야기는 뒤에
아첨자는 어떤 벌을 받고 정직한자는
어떤 마음의 평안을 얻는지의 이야기 또한
부차적이고 생각지 못한 선물에 불과하다.
선택을 할때 그 결과를 보고 선택을 해선 안된다.
윈드서핑을 하는 사람은 평생 한번뿐인 높고
서핑하기 좋은 바람을 기대며 그 해안가를 누빈다.
어떤 자는 하루만에 그런 바람을 만날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십년을 거기 살아도 그런 바람을
못 만날수도 있다.
그렇게 운명이나 예상치 못한 결과도 있는 것이
인생길인데 어찌 이쪽과 저쪽의 결과를 보아가며
선택을 한다는 것인가.
기질에 순응하여 이 길을 선택했건
선택을 하려다 기질을 어기면서까지 다른 길을 선택했건
선택에 결과를 보고 선택함은 없어야 한다.
그렇게
여분의 인생을 사는듯 이 초역채근담을 읽으면
아첨자는 처량해지고 정직자는 처량함은
없는 것만으로 가히 상쾌하기는 할법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