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고 우직하게 산다는 것

초역 채근담 삶의 언어 연재 2탄

by 이청락

이해를 넘어 납득으로 가려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타인이 생각기로도 "어 그럴 수 있어"라는 것 만으로는 모자라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어 그럴 수 있어"는 마지못해, 그렇게 못내, 어쩔수 없이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에, 어쩔 수 있기만 하다면 '호로록' 떠날 수 있는 나그네나 방랑자의 그것과 같다.


그러고 보면, 소박하고 우직하게 사는 채근담의 이야기가 어찌 뜻이 옳지 아니하랴.


그럼에도 돌아서서 그 책에 가슴 사무치게 납득되지 않음이 있다면 그건 삶의 고뇌가 그리 무겁다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깨달음이 그를 충분히 깊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아야만 하겠다. 이런점에서 필자는 도서큐레이션의 미래나 출판사의 미래 그리고 작가의 미래도 그 안에 일부는 웅심담기듯 담겨 있다고 본다.


필자가 이렇게도 길게 서두를 쓰며 이 채근담의 연재 2화를 말함에 주저하는 것은 '괴리'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상과 현실에 대한 늘 같은 생각의 고리로 말하는 그 '괴리'말이다.


소박하면서 우직하게 산다는 것을 격려해주고 싶지만 그것을 이해함은 있으나 필자가 도시 생각하듯 납득까지 가기위해선 다름이 필요하지 아니할까 하는 마음에 잠시 읽었던 행간을 재읽기도 하고 덮었다가 다시 열기도 하여 보았다.


경험이 얕음이 풋나기의 그것이 아니고 나쁜 관습이나 악습에도 덜 물들음이 있다고 말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기술과 책략에 젖어듦이 이는 좋지 못하며 차라리 그런 처세술보다 소박하고 우직함이 낫고 지나친 예의 보다 투박하고 순진함이 나으리라 초역 채근담은 말한다.


조금 더 양질이며 값비싼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고객 만족을 실천 시키려 할제, 가족의 생계와 영업의 빈곤에 대한 절박함 앞에서 식당주인은 번번히 무너지곤 한다. 그런 고민을 할 수 있는 좋은 영혼을 가진 식당주인을 책의 존엄도 해치지 않고 살려낼 방법은 전연 없는 것일까?


어제 쓴 연재1화에서 우리는 부끄럽지 않음에 대한 것도 결과에 대한 기대치에 기인하여 그 시초를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자유의지와 자유양심에 따라 행하고 결과에는 초연하기를 바람을 이야기 하였다. 이 초역채근담의 사람에 대한 연재의 그 기저에 은은하게 나는 이것이 흐름을 느낀다.


소박하게 우직하게 삶으로 내가 마음이 쾌활해진다면 그것으로 된것이다. 더 무엇을 바라랴


만얼마짜리 초역 채근담을 놓고, 그 무수한 이야기와 충고의 말 중에 한구절 가슴에 와 닿음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이 책으로 라면을 끓여먹을 불쏘시개를 해야만 이 책의 충분한 책값을 뽑아낸 것일까? 그냥 이렇게 "나는 맞게 살았다 또 맞게 걸어가고 있구나" 느낀 것 만으로 충분하다


TV에서 동물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며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는 쥐 떼를 보면 내가 만약 저 쥐 떼 사이에 있다면 어떨까 생각을 해본다. 나는 저리 살지 않겠다 생각이 드는 쥐가 있다면, 불현듯 멈춰서서 동료에게 한번 물어보며 이길 끝에 무엇이 있나 물어도 볼법이다. 그러고 나서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그 무리에서 벗어나면 된다.


우리는 무얼 바라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얻기 위해 가는가? 아니면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가는가?


고난과 고뇌와 고통을 겪어지나온 자는 안다. 그는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저 시커먼 굴 속을 바라보며 "나는 이겨냈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견뎌냈을 뿐이다. 어떨 때는 견디다보니 끝이 나버린 '견뎌냄'을 당해버린 경우도 왕왕 있다.


인생의 살이 라는 것이 가히 그러하다. 그런데 초역채근담을 읽고 무엇을 더 바라랴.


필자는 독자에게 이해를 넘어선 납득을 이야기 하거니와, 가슴에 손을 얹어 생각기로 채근담을 읽는 어떤 독자이건 죽은 자 아님에 심장이 펄떡대지 않은자 있던가? 혹은 손톱에 가시가 박히거니와 그를 빼어내면 파란피가 새어나오는 사람이 있던가? 없다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소박하고 우직하게 산다가 이해가 되고 납득이 안되면 그렇게 살지 아니하면 된다. 허나 그런 와중에 그것이 마음에 못내 신경쓰여 다시 소박하고 우직하게 사는길로 들어섰다면 그것으로 그것인 것 뿐이다. 조물주조차 우주와 지구를 만들었건만 찰나에도 생각이 수만가지로 뻗는 일개 개인의 생각을 어찌 다 읽어내고 안배하랴.


그럼에 차라리 강제는 없다. 결과의 보증도 없다. 당신의 마음이 닿는 곳으로 걸어가면 그것이다. 이 초역 채근담이 소박하고 우직하게 사는 것이 보통의 대다수 인간이 보겠기로 마음에 차지 아니하고 잘못되고 문제 많은 책이었더면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아니어도 지금 우리 곁에 남아 있을수 있을런가?


증거란 남아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책이며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찾는 책인줄 안다면 대부분의 인간 마음에 이것이 그렇게 '콱'들어 박히며 들을 만한 값이 있고 행할 만한 '법'이 있는 책이라는 방증인 것이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의 작가 서진규님의 책을 본적이 필자는 있다. 나는 내가 느끼는 희망과 그가 말하는 희망의 증거가 혹여 달라도 상관없다 싶었다. 나는 그것을 눈으로 읽으매 책의 내용은 매양에 마음에 새겨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고 그책 역시 그렇게 마음에 새겨졌다.


초역 채근담이 겨우 종이에 얽힌 활자 주제에 살아있는 인간의 존엄을 가르치려 함이 아니다. 때론 오연하고 오만방자하다라고 해도 책은 늘 그렇듯 제 길을 간다. 명저라면 더욱 그러하다. 입이 없음에 변명하지 않지만 그 입이 없음에 읽는 사람은 그를 더 깊이 마음으로 받아들일수 있다.


자 그러고 보면 이 책의 이 부분이 허무맹랑하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천라지망'을 믿는고로 악한자는 죽어서 지옥불에서 수억년의 영겁을 고통받으리라 믿고 있기는 하거니와 천하의 간악한 인간으로 천수를 누리고 단두대에서 목잘림없이 살다 간 이의 이야기도 읽기는 하지만 그가 죽는 그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참으로 스스로 후회됨이 있었으리라 본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이 나를 만든다. 그러고 볼때, 소박하고 우직하게 사는 것으로 남을 속이는 처세술보다 나음이 있고 너무 예의차림으로 상대방도 나도 불편케 하느니 차라리 투박한게 낫다는 채근담의 이야기를 들어 일러 더욱 무슨 미사여구로 포장을 해야 할까 생각도 든다.


어차피 마음가는 대로 하고, 어차피 모든 순간이 선택과 판단이다. 내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선택의 순간이 있음에 감사하며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서 인간답게 차후의 회환없이 어떤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것인가? 나는 모두가 소박하고 우직하게 산다를 선택하리라 본다. 적어도 비열하면서 타인을 속이면서 살아가면서 죽는날 겁이나 두려워하기에 인간의 삶의 천년이나 이천년도 아니고 백년은 너무 짧지 아니하던가.


사람이 죽어도 책은 남는다. 허나 아무책이나 남지 않는다. 명저는 더욱 남고 더욱 진하고 더욱 오래간다. 필자는 이것만으로도 채근담의 소박하고 우직하게 산다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이해가 아닌 납득으로 간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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