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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tter S Jan 03. 2021

집에서 일하면 좋을 줄 알았다.

번잡한 출근길 걱정 없이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 한 잔 내리고 베이글 하나 입에 문 채로 컴퓨터를 켠다. 간밤에 날아든 긴급한 이메일과 지시사항을 파악하여 재빨리 처리를 하고, 약속된 시간에는 ‘줌’을 켜고 화상회의에 참여한다. 나머지 시간은 음악을 틀어놓고 재주껏 눈치껏 업무와 휴식을 적절히 안배하며 혼자 일하는 고요와 여유를 즐긴다. 화면 한 켠에 띄워 둔 메신저창이 ‘나 일 잘하고 있어요.’를 어필하며 간간이 서로를 연결해 준다.


'재택근무'.

이 얼마나 우아하고 쌈빡한 단어인가. 물론 결혼 전, 최소한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 가족은 나와 남편, 그리고 세 돌을 갓 넘긴 딸 하나로 구성된 단출한 핵가족이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내가 낳은 적이 없는 아들 하나가 우리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 분명 네 살배기 우리 딸보다 나중에 얻었는데 나이는 그보다 몇 곱절은 더 많다.



사정은 이러하다.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수많은 사업장들이 재택근무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몇 년 전 내가 기업 인사팀에서 일할 때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던 분위기이다. ‘집에서 일하는 게 가능하기나 해? 위에서 급하게 찾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라는 식의 보수파들이 최전방에 자리 잡고 있던 나의 전 회사이자 남편의 현 회사도 직원들을 집으로 보냈다. 그런데 여기에서 꼭 예기치 못한 문제가 피어난다. 현장에서 수익을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업주 마음이 마음이겠냐만은, 집으로 돌아온 근로자들을 거두어 먹여야 하는 집사람들 또한 죽을 맛이라는 거다. 집에서 하루 종일 엄마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 셈.



재택근무 실시 후 나의 생활 패턴은 대략 이렇다. 평소보다 천천히 일어난 남편(가짜 아들)과 같이 늦잠을 잔 진짜 딸에게 서둘러 아침밥을 차려 낸다. 식사를 한 후 고양이 세수를 마친 가짜 아들은 작은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노트북을 켠다. 가는 곳마다 허물 벗듯 늘어놓은 옷가지와 잡동사니는 덤.

진짜 딸은 아빠가 회사에 가지도 않으면서 놀아 주지 않는다고 있는 떼 없는 떼를 끌어 모은다. 꼬맹이가 재택근무를 이해할 턱이 없다. 행여 화상회의 중 소란을 피울까 봐 제 몸을 부여잡는 엄마만 모질다고 느끼는지 꺽꺽거리며 울어댄다. 몇 년 전 한 외국인 교수가 BBC와 화상 인터뷰를 하던 장면이 오버랩된다. 방에 난입한 아이들과 그들을 끌어내려는 아내의 모습이 여과없이 방송에 나갔던 깜찍(혹은 끔찍)한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전력을 다해 딸을 막는다.

굳게 닫힌 작은방 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딸은 타겟을 바꿔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집안일 좀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청소며 빨래며 요리며 그 외에 해봤자 티도 안나는 쩨쩨한 허드렛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거기에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가짜 아들과 오매불망 나만 바라보며 징징대는 딸아이가 더해지면…. 상상에 맡기겠다.



아침을 차려서 먹고 나면 그새 점심 때가 돌아오고, 점심을 먹고 나면 또 저녁 준비할 시간이다. 괜한 엄살이 아니다. 오죽 하면 삼시세끼 해 먹는 콘텐츠만으로 TV 프로그램 하나가 만들어질까.

보통은 점심으로 빵이나 고구마 등을 대충 주워 먹고 마는데 가짜 아들이 있으니 제대로 먹여야 한다는 모성애와 사명감에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부리나케 어른밥과 아기밥을 이중으로 차려 먹이고는 다시 상을 치운다.

숟가락 하나 늘었을 뿐인데 배로 늘어난 설거지를 끝내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빨래를 마친 세탁기의 알림음이 울린다. 문을 여는 순간 군데군데 묻어있는 물컹하고 하얀 겔 덩어리들. 아뿔싸. 세탁기 안에는 밤새 받아 낸 딸의 소변으로 샛노랗던 기저귀가, 탈수까지 말끔히 되어 하얗고 보송하게 빛나고 있었다. 옆구리가 툭 터진 채로.



딸아이 낮잠 한 번 재우고 나면 따땃한 햇살이 거실창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갈 타이밍이라는 것을 귀신 같이 아는 딸은 장난감 전화기를 가져다가 제 엄마가 늘상 그렇듯 오늘의 미세먼지와 코로나 상황을 확인하는 시늉을 한다. 무조건 ‘좋다’고 결론 내린 딸에게 오늘도 코로나는 ‘안좋다’고 이야기해 보지만 마스크를 쓰고 나가면 된다는 논리에 우리는 오늘도 집 앞 놀이터로 출근한다. 가짜 아들에게 황금시간을 선사하며.

딸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 서너군데를 너끈히 찍고 미끄럼틀 오르내리기를 (거짓말 조금 보태어) 스물 아홉 번 정도는 반복한다. 그래야 스스로 만족해하며 순순히 집에 따라 들어갈 테다. 그때까지 아이는 방전될 줄을 모르고 시종일관 환희에 차있다. 나를 닮아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마스크 밖을 삐져나와 단지 안을 흔든다. 나뭇잎이 옴짝한다. 미세 바이러스도 뚫을 수 없다는 KF90의 마스크 조차도 아이의 기쁨은 막질 못한다.



해가 넘어갈 무렵 집으로 들어온다. 남편도 거의 일을 마치고 퇴근(?)할 준비가 한창이다. 노트북을 덮기 무섭게 “끝났어?”를 외치는 나와 왠지 모르게 억울해 보이는 그의 표정이 엇갈린다.

욕실로 직행해 아이를 씻기는 동안 남편은 타월을 들고  밖에서 대기한다. 이제부터 합동작전. 육아 4년차에 끈끈한 동지가  우리는  한마디 없이도 서로의  일을 익히  알고있다. 내가 아이 목욕을 시키면, 남편은 로션을 발라주고 옷을 입힌  머리를 말려준다. 그동안 나는 욕실을 정리하고 부엌으로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식구 머리 맞댄  오물오물 밥을 먹고난  내가 설거지를 하면 남편은 아이에게 양치질을 시킨  한바탕 건하게 놀아준다. 역시나 나를 닮아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화장실 배수관을 타고 다른 집으로 흘러 들어갈 테다. 마지막으로 동화책 두어권 읽어주고  방에 눕히면 . 오늘 하루 끝났다. 야호!



“나 이제 재택근무 신청 안 하려구. 강제 아니면 무조건 나갈래.”

지친 몸을 잠자리에 누이며 남편이 말했다. 물론 그도 그 나름대로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닐테다.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니 누군가 그랬다. 회사에서는 업무시간과 휴식시간을 알아서 조절하며 일을 하는데, 집에서는 잠시 쉴 때도 괜한 농땡이로 오해 받을까봐 신경이 쓰인다고. 그런 휴식시간 마저 놀아달라는 아이의 땡깡과 아내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저 남자의 마음은 오죽할까.




얼마 전 싱글인 아이 고모가 집에 놀러 왔다.

“재택근무 하니 어때? 좋아?” 공감이라도 얻고 싶은지 넌지시 물어보는 그녀의 오빠.

“응. 불편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더 좋은 것 같아. 오빠는?”

“완전 힘들어. 집과 일터의 경계가 없으니 일도 쉬는 것도 뭐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 진짜 결혼하면 다 달라진다. 정확히는 아이 낳으면.”



몇 번의 재택근무를 더 마치고 남편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사그러드는 듯 보였던 코로나는 다시 ‘심각’단계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애 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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