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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수 Feb 13. 2022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누군가에게 영원한 안녕을 고하고 나면, 우습게도 우리 속에는 그가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가 안녕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전자는 같은 시간을 지내온 상대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되고, 후자는 나의 존재가 그만큼 상대에게 중요한 존재였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안녕을 고한 우리는 어떤 결과가 닥쳐오든, 마음 한 켠이 아린 이별을 맞이하곤 한다. 애초에 이별이란 헛헛한 일이니까.


5년 전, 신입사원으로서 근무를 시작했다. 이미 나름대로 사회생활은 해볼 만큼 해본 중고신입이었기에, 회사생활에 대한 막연한 환상 따위는 없었다. 다만 더 나은 대우와 적당한 업무 환경 정도면 족하리라 스스로 되뇌었다. 회사란 곳은 마치 사람 사이의 관계처럼 판에 박은 듯하면서도 각양각색인 곳이기에 누구나 그렇듯 뻔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첫 부서장은 이제사 생각해보면 더 별로인 인물이었다. 매일 새벽 한 시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내가 아침 8시에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곤 했고, 심지어 그 불평은 마치 군대에서처럼 부서원들을 통해 연차 순으로 구전되어 말단의 내게 전해지곤 했다. 그가 여느 회식 자리에서 주먹질을 해 자리를 잃게 되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그의 친절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 주먹 하나의 영향으로 참 많은 사람의 인생이 바뀌었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급히 끌려들어 왔고, 누군가는 그 틈을 타 새로운 세상으로 재빨리 도주했다. 그리고 회사는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러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부서장은 비교적 온순한 사람이었지만, 격변하는 사내 정치환경을 읽어낼 만큼 영리한 사람은 아니었고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타의로 직을 내려놓았다. 자리를 옮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불의의 사고로, 누군가는 더 나은 환경을 꿈꾸며, 누군가는 다른 부서의 필요에 의해 부서를 떠나갔다. 불행히도, 혹은 다행히도 내게는 그 어떤 불의의 사고도, 혹은 더 좋은 기회도 생겨나지 않았기에 나는 그 자리에 머물렀고, 어느새 부서의 고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고인물은 썩는다지만, 한 부서에서의 고착화된 근무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업무는 여전히 고되지만 그래도 그 고된 환경을 긴 시간 버텨낸 베테랑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고,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나아진 부서 실적은 마치 전쟁영웅 가슴팍에 달린 표창처럼 내게는 그럴싸한 자랑이었다. 부서의 사람들은 수시로 바뀌었기에, 당연하게도 부서에서의 내 역할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언젠가부터 나는 마치 이 부서에서 천년만년 일할듯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니, 고인물은 썩는다는 말을 절대 진리로 삼고 있는 인사담당자에게는 내 이름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컴퓨터 속 엑셀 파일을 열어 현 부서 근무연수순으로 정렬한다면 나는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었고, 이 주인공을 빨리 극에서 퇴장시키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그렇게 다음 부서 이동에 대한 협의가 시작되었다. 현 부서에서 그간 많은 고생을 했다는 건 함께 인정하는 사실이기에 나는 비교적 넓은 선택권을 얻을 수 있었고, 여러 고민 끝에 다음 행선지를 결정했다. 알음알음 정기 인사이동에 대한 소문이 나돈 후, 공식적인 인사발령이 이루어졌고, 내 5년간의 부서 생활은 바야흐로 마무리되었다.


인수인계의 시간, 내 업무의 후임자를 결정하는 데만 일주일이 소요되었다. 서로 안 하겠다고 내빼는 통에 부서장은 삼고초려의 노력 끝에 후임자를 선정했고 이후 뒤늦게 인수인계에 착수했다. 웃기게도 나는 업무를 인수인계하며 내심 후임자가 일을 잘 해내지 못하기를 바라는 나쁜 마음을 먹곤 했다. 힘든 업무를 애써 별거 아닌 척 해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일은 되레 엄청 힘든 척해보기도 하며. 어떻게든 다 돌아가는 게 회사야, 라는 얘기는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래도 뭔가 나 아니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 없이도 너무 잘 돌아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했다. 미련은 여전히 남아 부서를 옮긴 뒤에도 몇 주간은 간간이 전 부서의 실적을 뽑아보곤 했다.


회사에서의 삶 또한 하나의 공연이라면, 여느 회사원의 공연은 길거리에 스쳐 지나가는 버스킹에 가깝다. 수십 년이 흘러도 회자할만한 뮤지션이 아니기에 그럴듯한 기록물 따위는 없다. 단지 그때 그 순간을 함께했던 사람들의 뇌리에만 막연히 기억되고, 그 공연의 흔적은 수로 표기된 회사 실적 여기저기에 미세한 각인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렇다면 나는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 걸까.


지난주, 갑작스레 전 부서의 부서장이 점심 식사를 청해왔다. 꼭 용건이 있을 때만 자리를 마련하는 그이기에 두려움이 앞섰다. 추가적인 인수인계를 요청하려나, 아니면 내가 한 업무 중에 잘 마무리되지 않은 게 있었나 하는 고민이 생겨났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간 자리에서 그는 그저 미안하다고만 했다. 나는 굳이 부연을 요구하지 않았다. 고된 시간을 버텨준 데에 대한 미안함일지, 챙겨주지 못한 고과에 대한 미안함일지, 또 다른 마음일지는 모르겠다. 그저 5년간 함께 했던 그 자리가 안녕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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