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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수 Mar 12. 2022

NO SUBJECT

왜 사냐건 웃지요. 라는 시구를 꽤나 좋아하던 나였다. 인생 전체를 정의하는 중차대한 질문을 그런 너털웃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여유가 부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나도 그저 그런 대답밖에는 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다. 길가는 사람 열 명을 붙잡아두고 왜 사십니까? 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논리정연하게 자신만의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두어 명은 될까? 나는 그 물음에 명확한 답을 할 자신이 없다.


그저 돌이켜보면 이왕 사는 거라면 이렇게 살고 싶다. 정도의 바람은 있었다. 나쁜 사람은 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초라한 사람도 되고 싶지 않으며, 기회가 된다면 조금이나마 이름이 남는 삶이라면 더 좋겠다는 욕심 정도가 내 소소한 희망이었다. 여태껏 그 소소함을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듯하다. 큰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욕심은 없는 덕에, 슬슬 내 알량한 그릇에 맞게 밥벌이도 하고, 또 가끔씩은 소소한 사치도 즐기고, 드물게는 주변 사람들에게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처지는 된 것 같다. 이 정도면 뭐 잘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가끔씩은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삶을 동경하기도 한다. 독립운동, 민주항쟁처럼 내 인생 전체를 던질 만한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걸 던진 사람들. 그럴만한 문제는 없는 호시절에 살고 있어 복에 겨운 부러움이겠지만 그런 명확한 방향을 가진 삶을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 생애에도 그런 목표가 주어지기는 할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광야를 걷는 일이 험한 산을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산에는 정상이 있고, 끝이 있기에 가는 길이 험할지언정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어떻게 그곳에 오를지를 고민하면 된다. 하지만 사방이 지평선으로만 가득한 광야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럴싸한 대의 같은 건 없더라도 그저 이렇게 살면 돼 라며 나를 이끌어줄 느낌표 뜬 게임 NPC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삶은 게임이 아니기에 그저 그때그때의 삶에 맞춰 다양한 주제들을 욱여넣는다. 더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운동을 할 때도 있고, 영화에 빠질 때도 있고, 게임을 하며 말 그대로 시간을 죽여보기도 한다.


생은 이분법이라 죽지 않으면 살 수밖에 없고, 죽지 않을 이유가 있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다. 죽지 않아야 할 이유는 많다. 좋은 사람들, 새로운 것들, 모르는 것들처럼 영속적이진 않더라도 내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존재는 아직 많고, 혹여 나의 부재가 누군가에게는 큰 슬픔이 될 수도 있기에 나는 아직 하루하루를 걸어 나가야 한다. 아무런 걱정도, 해야 할 일도, 고민도 없는 순간 나는 종종 공백을 느낀다. 이렇게 비어있는 순간들을 여느 주제들로 억지로 욱여넣으며 몇십 년 동안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내 삶에도 그럴듯한 명분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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