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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수 Jun 11. 2022

불면의 밤

간간이 느닷없는 불면의 밤이 찾아오곤 한다. 여느 날에는 커피 다섯 잔을 쏟아부어도 꿀잠 자는 나지만, 정말 아무런 까닭 없이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세 시를 맞이할 때가 있다. 야속하게도 이 느닷없는 불청객은 내 사정을 도통 살피지 않기에,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의 처지를 난처하게 만들곤 한다. 잠이 들기 위해 불을 끄고 눈 질끈 감으며 10분 정도 꾸욱 참아보지만, 결국 어느새 스마트폰을 손에 쥔 나는 말똥말똥하게 깨어있고, 그렇게 하릴없는 새벽 위에 놓이면 차라리 체념하고 허리를 꽂게 펴서 다시 침대에 걸쳐 앉는다.


어차피 잠들 기회는 놓쳐버린 그즈음이면 내 시간은 새하얀 낙서장 위에 놓인다. 무엇이든 그려도 되고, 무엇을 해도 무용한, 지루한 수업 중 낙서처럼 그저 지나가면 증발해 버릴 시간. 아무런 목적 없이 컴퓨터를 켜, 컴퓨터를 켠 이유를 만들어보려 한다. 괜스레 메일함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철 지난 SNS에 접속해 앞으론 보기 힘들 사람들을 되새기기도 한다. 마치 손흥민에서 시작해 판관 포청천으로 끝나는 나무위키 서핑처럼 불면의 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그렇게 어디로 튈지 모르던 여행은 잠이 들어서 혹은 해가 떠서 끝을 맞이 하고, 아침이 되면 지난 밤 질러버린 무언가에 대해 고민하며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이 되어도 딱히 달라질 것은 없다. 월급 받으려면 출근 도장은 찍어야 하고, 도장 찍고 나면 퇴근 시간을 목 빠지게 기다리지만, 퇴근을 기대하는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불면의 밤에 잠에 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루한 근무 시간의 끝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근무 시간이 끝나면 또 밤이 시작되고 운동이든 약속이든 이것저것 내 밤을 채워줄 무언가와 함께 또다시 잠에 들기를 기다린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어찌 보면 깨어있는 시간 전체가 그저 불면의 밤이라고 둘러댈 수도 있겠다. 하루하루 좀처럼 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무용한 것들을 이것저것 채워 넣는 시간들. 인생 전체를 놓고 봐도 어찌 보면 죽음이라는 긴 잠을 기다리는 것일 뿐 큰 차이는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소중한 내 인생을 여느 불면의 밤처럼 무기력하게 흘려보낼 수는 없다. 결국은 긴 잠에 들면 쓰잘 데 없이 가루가 되어버릴 운명이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목적이 있고 영원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엊그제 하늘은 아무런 이유 없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동네 친구들과의 시시한 장난에 웃음 짓기도 한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경의선 숲길, 말이 통하는 친구와의 농담 따먹기, 여름날 에어컨 켜고 이불 덮기처럼 아무런 쓸모 없는 찰나가 내 삶을 가치 있게 채울 때도 있다. 오히려 가끔씩은 그 목적 없음이 그 찰나를 더 가치 있게 만들기까지 하는 걸.


어찌 보면 세상 모든 게 다 무용하다는 씁쓸함 앞에서, 어차피 모든 게 다 무용하고 사라져버릴 것이라면, 나는 그저 그 순간순간 조금 더 충실히 무용하기를 택하고 싶다. 어차피 어딘가에서 흘러 흘러 결국 여기에서 만나 또 어딘가로 흩어져버릴 우리들이지만, 그게 뭐 어떤가. 그저 함께하는 이 순간이 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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