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속담은 옳다. 아쉽게도 인간은 물리적인 환경에 무지막지하게 지배당하며, 그 환경에 따른 결과물을 마치 자신이 선택한 길인 것 마냥 포장하곤 한다. 그게 아니라면 인간은 환경 앞에서 너무나도 무기력한 존재가 돼버리고 마니까. 비극적인 사실은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매주 하루 8시간 이상을 물리적으로 사회에 상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상납 된 일터에서의 8시간은 그 인생의 일부임에 불과함에도, 우리는 흔히 그 8시간에 인생 전부를 지배당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딘가를 퇴사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매우 매우 유익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내 업무와 내 회사가 내 인생의 전부인 것만 같았는데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걸어 나오는 순간 그 모든 게 하릴데 없이 사소한 것임을 깨닫게 되니까. 전후의 허무함처럼 그간의 치열했던 내 삶은 무얼 위한 거였나 하는 허무감에 지배되기도 하고, 다시 일하게 된다면 이 사소함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퇴사의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물론 회사생활이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좋을 때는 뭐든지 좋다. 부서장은 우리를 확실히 책임지는 보호자이며, 신입은 풋풋한 아이디어로 가득한 우수 인재고, 과장대리는 실무에 통달한 백전노장처럼 우쭐해진다. 잘 맞는 사람들과 좋은 성과를 내며 일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많이 쳐줘 회사 생활의 2할이 그런 호시절이라면, 나머지 8할은 악몽에 가깝다. 무책임하거나, 꼰대 같은 부서장과 권태에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과장대리, 눈치 보느라 숨 막히는 하루를 보내는 신입. 회사에서의 그 악몽이 더 두렵게 다가오는 건, 우리는 물리적으로 그 환경 속에서 8시간을 보내고, 곧 그게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착각해버리기 때문이다.
살면서 쓴 사직서가 족히 세 장쯤은 되는 것 같은데, 나는 아직도 그런 착각 속에 종종 빠지곤 한다. 회사에서의 평가는 곧 나란 인간에 대한 평가이며, 회사에서의 성패는 내 인생의 성패라고 회사에서의 나와 내 자아를 동치시켜버리는 그런 착각. 그 덕분인가 요즘은 퇴근해서도 항상 일하는 기분 속에 빠져 있곤 한다. 꿈속에서 업무 지시를 받고, 내일 쓸 보고서 내용을 구상한다. 물론 꿈이기에 일어나보면 그런 업무 지시도, 내일 쓸 보고서도 없다.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겠다는 판타지는 버린 지 오래다. 오히려 버트런드 러셀의 말처럼 우리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 성실함을 강요당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중세 귀족처럼 놀고 먹는 삶이 왜 나쁘겠는가. 느지막이 일어나 낮에는 수영하고, 소파에 누워 라디오 좀 듣다가, 오늘 저녁은 뭐 먹지 깊이 있게 고민하는 삶. 물론 삶이라는 게 쉬이 내 마음처럼 흘러가지는 않는다.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순 없지만, 밥을 먹을 수 있고, 차를 살 수 있으니 그게 어딘가. 글쎄, 집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퇴사이유서를 채울 내용은 가득하다. 일은 필수적이지 않으며, 너무 많은 시간을 내게서 빼앗고, 온갖 부정적 에너지를 내게 주입한다. 이렇게 회사에서 시간을 허비하기엔 내 인생은 너무나 소중하다. 그럼 이제 퇴사 날짜 적고 제출만 하면 될 터인데 나는 언제쯤 그 날짜를 적을 수 있을까. 만일 기한을 적는다면 만년으로 해야겠다. 그렇게 나는 매주 월요일 출근길에 로또를 구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