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엔 비대면 마라톤이라는 게 있군
런데이로 차근차근 30분 완주를 위해 달리던 시절, 달마다 주최하는 런데이 마라톤을 해보기로 했다. 3분간 달리기가 가능했던 4주 차 코스를 하고 있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달리기에 아주 조금은 친숙해졌을 때였지만 마라톤이 그리 멋질 때는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바로 민소매, 갈색 피부, 볼이 홀쭉한 마라토너 얼굴, 선글라스, 땀과 같은 단어들이 하나로 모여 만들어낸 전형적인 오래된 이미지가 떠올랐다. 50대의 운동 좋아하는.. 왠지 자전거도 좋아하시고, 술 좋아하시고 등산도 좋아하실 듯한 우리네 아버지(아버지라 하기엔 내 나이가 좀 찔린다. 삼촌 정도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나와 항상 접점이 없었던 인물군이었지.
생각해보니 직장에서 나를 볼 때마다 마라톤을 권유하던, 비싼 사이클을 타고 출근하셨던 타 과 반장님이 그 이미지의 핵심 같다. 원래부터 내 머릿속에 있던 마라톤이라는 이미지 골격에 진흙으로 모양을 땅땅 잡아 준 이 분은 항상 야외운동을 하셔서 그런지 정말 까무잡잡하시고, 운동하는 사람 특유의 건강한 쾌활함에, 일적으로 연락할 일이 있을 때마다 마지막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오늘의 좋은 글귀와 음악을 보내주시던 분이셨다. 마라톤계에 이런 따뜻한 분들이 한 8654명 정도 계시며 서로 달리기도 하고 사이클도 타고 술도 드시면서 약속을 잡을 땐 항상 좋은 글귀를 같이 첨부하시겠지.
요즘처럼 달리기가 다시 2-30대 젊은이들에게 핫해져서 러닝 크루도 생기는 때에(근데 마라톤클럽과 러닝 크루의 차이는 뭘까? 독서실과 스터디 카페 정도의 차이일까? 본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세대가 변한 느낌?) 시대착오적인 생각인 건 알지만 마라톤은 저 먼 오지 원주민들의 축제 또는 스페인의 산 페르민(질주하는 황소를 피해 달리는 걸로 유명)같이 너무 원초적이고 무모해 보여 조금은 무서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비대면 마라톤이라니? 직접 그 무서운(?) 분들을 만나지 않고 달리기를 하고 상품을 받을 수 있다니? 그리고 무엇보다 그동안 내가 잘 달리고 있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등수도 알려준다니?(너무 내가 줄 세우기에 익숙해진 걸까?) 너무 좋아! 아무도 모르게 내가 마라톤을 해볼 수 있다니!
달마다 있는 런데이 마라톤은 일정 기간 안에만 달리고 인증하면 되는 비대면 마라톤과는 다르게(지금은 런데이도 기간 안에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게 바뀌었다) 정해진 일시에 한 번에 출발하는 형식이었는데 익숙한 성우가 카운트 다운을 해주고 총소리가 울리니 진짜인 듯한 느낌이 들어 더 설렜다. 가장 짧은 거리인 3km를 신청해 놓고(이제 나는 5km가 얼마나 긴지 알게 됐다) 3분 달릴 수 있으니 3분까진 달리다가 걷자고 다짐을 했다.
막상 출발하니까 몸이 무척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대회라서 아드레날린이 좀 분비된 걸까? 물론 가벼운 몸은 얼마 안 가서 사라졌지만 계속 신이 났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마라톤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겠지 싶어 웃기기도 했다. 나는 항상 달리던 곳에서 마라톤을 하고 있고 또 어딘가에서 나와 같이 이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이 달리고 있겠지. 아마 반 정도는 나처럼 마라톤이 처음이겠지 생각하니 신기했다. 내 옆사람은 내가 뭐하는지 모르고, 같이 달리는 사람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니 아이러니하군. 정말 과학기술은 대단하구먼(이건 200미터 정도 달리면서 한 멋진 생각. 이후론 건설적인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항상 시간을 정하고 달리다가 처음으로 거리를 정하고 달리니 새로웠다. 런데이 마라톤은 km마다 거리를 알려주는데 한참 달려도 너무 알림음이 없어서 뭔가 잘못되었다 싶었다. 3분은 넘게 달린 거 같긴 했는데 혹시 확인했다가 아니면 기운이 쫙 빠질 거 같아 아예 1km 알림이 들리기 전까진 시계를 보지 말자 결심했었는데 이놈의 런데이가 아무 말이 없다(근데 나 1km를 몇 분이면 달릴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결국 숨이 너무 차서 걸으며 확인해보니 5분! 5분을 넘게 달렸고 약 700m를 달려왔다. 생각보다 오래 달려서 기쁘다가, 아직 1km도 못 왔다는 생각에 다시 슬퍼졌다. 700m도 이렇게 길었는데 나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시간으로 달릴 때는 어떻게든 버텼는데, 거리로 달리니 마음과 몸의 괴리가 느껴져서 더 힘들다. 힘들어서 마음은 빨리 달려버리고 끝내고 싶은데 슬픈 몸뚱이는 걷는 건지 뛰는 건지 싶게 움직이고 있다. 이쯤이면 항상 하는 생각(‘내가 뭔 놈의 영화를 보자고 이걸 하고 있는 걸까?’, ‘미쳤다. 나 이제 이거 끝나면 안 달린다. 이런 거 신청 다신 안 해’, ‘저 나무까지 가면 진짜 걷는다’ 등등)을 무한 반복하며 나아가다 보니 200m 남았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계속 거리를 확인하고 왔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닌데도 너무 기쁘다! 100m! 50m! 끝!
도착했지만 그동안 연습했던 것처럼 멈추지 않고 천천히 걷는다. 걸으며 바로 내 시간과 등수를 계속 확인한다. 페이스도 보고, 심박수도 보고 칼로리도 보고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너무 뿌듯하다. 내가 해낸 거야. 진짜 마라톤에서 모여 있는 관중들이 환호를 보내는 것처럼 내가 나에게 그만큼의 환호를 보낸다. 나 꽤 멋진 사람이잖아!
이 기억이 너무 좋아서 이후로도 몇 번의 마라톤을 더 했다. 그전에 다신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건 잊어버리고. 신청 거리는 언젠가부터 5km로 늘었다. 이제 쉬지 않고 30분 이상을 달릴 수 있지만 할 때마다 언제나 힘들다. 하지만 이제는 마라톤이 무섭지 않다. 나도 이제 달리는 사람이니까.
여담 하나, 마라톤을 통해 얻은 편의점 쿠폰은 아이에게 생색을 내며(엄마가 달리기 해서 받은 거야!) 과자를 사는 데에 쏠쏠하게 썼다. 내 기억뿐 아니라 아이의 기억에도 멋진 사람으로 남고 싶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여담 둘, 이 외에도 여성마라톤, 빵빵런 등 몇 가지 비대면 마라톤에 참여해봤는데 여성마라톤 티셔츠를 너무 잘 입고 있어서 다음 해에 정식으로 열린다면 참가해볼 예정이다.
어쩌다 보니 런데이에 대한 홍보글처럼 되어버렸는데 그건 절대 아니고, 달리기의 시작이
런데이라 이에 관해 할 이야기가 많아졌다. 다음부턴 다른 이야기를 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