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새만금 지평선 마라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첫 마라톤이라 어제부터 긴장하며 제발 비가 오지 않길 바랬는데, 하늘은 우중충하고 공기는 차갑다. 아침 7시에 알람을 맞추어 놓고 십분 넘게 뒹굴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역시 전북지역 마라톤만 신청해놓길 잘했지. 아니면 얼마나 일찍 출발해야 되는 거야? 폭우가 쏟아지는 게 아니라면 이런 날씨가 더 괜찮기도 하지. 더우면 숨이 차서 너무 힘드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준비를 시작했다. 슬슬 흥도 오른다(비 맞으면서 달리는 것도 멋진 로망인데? 완전 선수 같아!). 빗방울이 튀는 아스팔트 도로. 물이 고인 바닥엔 거울처럼 가로수가 비치고 그 사이를 달려가는 사람들. 생각만 해도 두근거린다. 흥이 나서 두근거리는 건지 긴장해서 두근거리는 건지 조금 헷갈리긴 하지만.
집에서 대회장까지는 30분이 걸린다. 이 김제 마라톤은 집 근처에서 열리기 때문에 달리기 문외한이었던 시절부터 알고 있던 대회라 조금은 친숙하다. 해마다 직장 마라톤 동호회에서도 단체 참가 신청을 해주기 때문에 내 주위에도 참가했던 분들이 좀 있기도 하다. 직장 상사분이 가족들과 5km에 나가신다고 해서 우와 너무 힘들지 않아요? 대단하시다(영혼도 없고 나갈 생각도 없고) 한마디 했었는데 거기에 내가 나가게 되었다. 그것도 첫 마라톤 대회로.
대회장에 출발 1시간 전에 도착했다. 뛰는 것도 문제지만 주차가 너무 걱정이 되어(운전할수록 주차 노이로제가 생기고 있다) 나답지 않게 주최 측에서 말한 권장 시간에 도착해보았다. 도로 통제도 하는데, 내 차가 못 들어가면 안 되니까! 달리기 전이라면 모를까 달린 후에 상품을 들고 긴 거리를 걸어갈 자신이 없다(참가 상품이 무려 김제 햅쌀 10kg). 역시 김제하면 쌀이지! 하며 지역 마라톤 도장깨기의 첫 시작이 좋다고 즐거워했는데, 막상 비가 오고, 달리기 전이 되니까 그냥 마니아 신청해서 달리기만 할걸 그랬나? 10kg 쌀을 이고 지고 올 생각을 하니 심란해졌다.
김제 시민 경기장은 걱정과는 다르게 주차 자리도 충분하고 시 외곽에 위치해 있어서 차가 막히지도 않아서 한가로웠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쌀을 먼저 받아서 이고 지고 나르고 있었다. 역시 경험자들의 지혜는 다르네, 달리기 전에 받아놓으면 나중에 힘들진 않겠다 싶어서 나도 그 행렬에 합류했다. 자원봉사자분이 익숙하게 내 어깨에 10kg를 올려주셨다. 이 정도는 들만 하다는 마음이 아.. 바닥에 한 번만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뀔 때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나처럼 웨이트를 하지 않는 여자라면 주차는 경기장 최대 5분 거리 내에 하시길 추천한다. 도착해서 뒷좌석에 돌쇠처럼 쌀을 던져 놓으니 땀도 좀 나고 숨도 살짝 가쁜 것이 이렇게 준비운동을 하라는 주최 측의 배려인가 싶었다.
이번 마라톤의 목표는 일단 완주. 그동안은 8km 좀 넘게 달려봤기 때문에 10km는 미지의 세계일뿐더러 내가 주로 달리는 수변공원은 거의 평탄하기 때문에 오르막 내리막도 좀 걱정이다. 페이스는 7 분주로 천천히 달리기로 마음먹었다(사실 더 올리기도 힘들다). 하프 참가자들은 출발했고 이제 10km 출발이다. 트랙에 모여 서서 카운트다운을 같이 외친다. 이어폰에 음악을 재생한다. 비는 적당히 오고 있다. 여기서 더 세지지만 않으면 된다. 그동안 달리면서 듣던 곡들이 익숙하게 흘러나오고 심장이 발끝까지 피를 보내는 느낌이 든다. 출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서일까 초반 익숙해질 때까지는 몸이 무거운데 그런 느낌이 덜하다. 더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식적으로 스마트워치를 보며 페이스를 확인한다. 중후반에서 출발했는데도 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앞질러간다. 그래도 괜찮아! 빨리 달리는 게 내 목표는 아니니까.
2km를 지나서부터 오르막이 시작된다. 숨이 점점 가빠진다. 몸도 점점 무거워진다. 왜 마라톤을 달린다고 했을까? 왜 이런 짓을 하려고 했을까? 싶을 때 급수대가 나타났다. 급수대를 핑계로 잠시 서서 물을 마시고 바람막이도 벗어본다. 달리기 전에는 좀 쌀쌀했는데 달리니까 몸이 데워졌다. 마음을 재정비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코스는 전반적으로 좋았다. 도로 한쪽이 모두 통제되었고 반대방향에도 차량이 많은 도로가 아니라 여유 있게 달릴 수 있었다. 주변은 한가롭고 건물들은 거의 없이 낮은 구릉과 논밭들이 보인다. 이 정도면 지평선이라고 할 만하다. 날씨가 좋았으면 더 아름다웠을 텐데 조금 아쉽다. 초등학교 사회 수업에서인가?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은 김제평야라고 배우고 다시 김제에 갔을 때 조금 실망했었다. 이게.. 지평선이라고? 옆에 구릉들이 있잖아요! 저 멀리에는 낮은 산도 보이잖아(아마 내 맘속에서는 미국 어딘가의 대평원 같은 것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정도의 지평선이 보이는 곳이 과연 이곳뿐일까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이곳저곳을 다녀보니 이렇게 탁 트인 곳이 많지 않구나 싶다. 특히 출장을 다녀올 때 그걸 많이 느끼게 된다. 해 질 녘에 김제 근처를 지나게 되면 지면으로 내려오는 태양이 땅 전체를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강렬해서 운전이 힘들 정도다. 마라톤에서는 5km가 지나고 반환점 근처에서 황금색 논과 코스모스, 그리고 지평선을 잠시 감상할 수 있었다(10km 코스는 전반적으로 논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지평선을 오래 감상하고 싶다면(그리고 체력이 충분하다면) 하프코스를 달리는 것이 지평선을 즐기기 좋을 것 같다.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과 같이 달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자세를 나와 비교하게 되는 걸 멈출 수가 없다(이 사람은 가볍게 잘 달린다. 저 사람은 나보다 못 달리는데 등등). 그만두고 싶은데 아마 내 달리기 실력이 어느 정도 선에 오르기 전까진 계속 비교하게 되지 않을까.. 폼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오래 달려본 사람은 나 같은 막눈에게도 티가 난다(사실 마라톤클럽이 인쇄된 싱글렛을 입고 있으면 더 자세가 좋아 보이긴 했다) 느리더라도 일정한 속도와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표정이 편안한지를 보면 된다. 처음엔 오래 달린 분들이 왜 나 같은 초보와 비슷하게 가지 싶었다. 근데 그분들은 빨리 가려고 달리는 건 아니었다. 즐겁게 끝까지 달려보자고 시작한 거지. 다들 각자의 속도로 끝까지 가는 각자의 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7km 근처에서 혼자 열심히 달리는 초등학생 아이가 있어서 눈에 띄었는데, 옆의 중년 여성 러너들이(같은 마라톤클럽이신 듯했다) 이름을 물어봐주고 칭찬을 해주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장하다, 힘들게 할 필요 없어, 즐겁게 달리면 되는 거야~라는 이야기가 나에게도 힘이 되었다.
비는 거의 소강상태라 주로에 가끔 고여있는 물만 조심하면 달리기 딱 좋았다(빗물이 첨벙 하며 발에 들어올 때 기분이 별로니까 조심해야 된다). 얼마나 달렸지? 스마트워치로 거리를 확인하며 달리고 있을 때였다. 아직 7km니까 3km 더 달려야겠군 생각하며 조금 더 달렸을까? 옆에 2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뜬다(알고 보니 코스가 조금 짧았다. 9.5km 정도?). 갑자기 좀 더 기운이 난다. 1km를 순간 이동한 느낌이다. 아직 몸이 괜찮은데 너무 힘을 남긴 것 아닌지 괜한 걱정도 해본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몸이 달리는 기계가 된 느낌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달려갔는데 저 앞에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점점 발이 빨라진다. 앗, 이 정도 속도로도 달릴 수 있었군 하며 경기장에 들어선다. 트랙에 들어가서는 달리기가 더 편해져서 앞사람을 앞지를까도 잠깐 생각했다가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보고 내가 잘 찍히게 속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슬쩍 카메라를 쳐다보며 살짝 여유 있는 표정을 해본다(결승선에서 카메라가 들어오는 사람들을 찍어준다. 나중에 배번호로 내 사진을 찾아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어서 만족할만한 인생 샷을 얻어냈다. 다음부터도 결승선에서 계속 카메라를 의식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역시 너무 힘들게 달리지 않길 잘했다.
기록은 1시간 5분! 1시간 15분을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선전해서 너무 기쁘다! 그리고 생각보다는 몸이 괜찮다. 완주메달을 받아 들고 사진도 한번 찍어서 가족 단톡방에 공유했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맛집을 검색해서 혼자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는데 비도 오고, 맛집을 알아보는 것도 너무 귀찮아져서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럴 땐 집에서 가까운 게 좀 아쉬운 것 같다. 먼 곳으로 갔으면 움직인 게 아까워서라도 더 구경하고 특산물을 먹고 돌아왔을 텐데.. 아무튼 처음이니까, 어설픈 것도 있기 마련, 다음엔 먼저 달린 후 계획을 세우고 가야지.
끝나서 저녁까지 계속 내 배번호 사진을 찾아보고 기록을 다시 보고, 유튜브에 마라톤 영상을 찾아본 내게 남편이 넌 자기애가 참 대단하다고 했다. 반만 칭찬인 것 같지만 그런 내가 난 좋다. 만족한다. 다음 마라톤은 2주 후다!!
주차 : 김제 시민 경기장은 시 외곽에 위치하기도 하고 주차공간도 많이 있어서 1시간 전에 도착했더니 공간이 꽤 여유 있었다. 거의 대부분 참가자 차량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기념품 : 때마다 5km까지 쌀을 주나 안 주나 가 좀 갈리긴 하지만(이번엔 5km는 티셔츠) 10km부터는 10kg 김제 햅쌀을 주고 있다. 끝난 뒤 막걸리와 편육, 쌀국수(컵라면) 등등 먹을거리도 많이 줬다는데 이번에 비 때문에 일찍 돌아와서 먹어보진 못해서 아쉽다.
10km 코스 : 거의 다 아스팔트 도로이고 차량통제도 널찍하게 해 주기 때문에 불편한 점은 없었다. 2 ~ 3km 지점(돌아올 때 8km 구간)에 꽤 긴 오르막이 있고 지하차도가 하나 있어서 이 지점에서 좀 힘들다. 반환점 근처 코스는 코스모스가 보이는 시골길(왕복 2차선 도로)인데 양쪽 다 통제를 해주었다. 이 부근은 거의 평지여서 달리기 편하다.
관광 : 김제 지평선 축제가 유명한데 아쉽게도 마라톤과 같은 시기에 열리진 않았다. 벽골제 민속유물전시관에 가면 전망대에서 지평선 풍경도 볼 수 있고 아이와 같이 구경할 거리도 있어서 추천한다. 경기장 자체도 공원과 같이 조성되어 있어 마라톤 후 산책하기 좋고(산책할 마음이 들진 미지수지만..) 바로 옆에 김제시에서 운영하는 지평선시네마에서 영화를 5000원에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