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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Nov 10. 2021

올해 첫눈을 하필 너와 함께

여행을 함께 가면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친구

 그때는 그걸 몰랐다. 대학 시절 수학여행 이후로 남과 함께 이틀 이상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여행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목적이 같다고 해서 얼렁뚱땅 함께 여행을 가면 안된다. 집을 떠나 이틀 이상 함께 묶어야 하는 여행은 '목적'만 맞아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같지 않으면 여행뿐 아니라 서로의 관계까지 망칠 수도 있다.  


 K는, 일과 가정에 열정이 있고 언제나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멋쟁이였다. 우리는 나이 차이에 비해 비교적 잘 통했다. 서로에게 공감하며 긴 시간을 대화해도 지루하지 않고 그녀 역시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며 공감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친해졌고 자연스럽게 함께 여행 계획을 짜게 되었다. 우리는 다섯 명이 함께 해외여행을 갔다. 설렘과 기쁨이 가득했기에 긴 비행시간도, 좁고 불편하고 어수선한 기내 환경도 인내할 수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여행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아는 K는 일부분일 뿐이었다. 폭탄 맞은 것 같은 그녀의 객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른이고 엄마인데 정리와 정돈의 습관 같은 것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거야 그녀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상관없었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다.'

8시 40분에 조식당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머리를 질끈 묶고 헐렁한 티셔츠와 배기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끌고 서둘러 내려가 조식당 앞에서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는 그녀에게 30분이 넘어 전화를 했다. '먼저 먹고 있으라'는 그녀의 대답이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여독으로 늦잠을 잤겠지 했다. 그러나 약속보다 1시간이 늦은 그녀는 풀메이크업에 머리 세팅, 그리고 옷까지 멋지게 입고 내려왔다. 여행 내내 외출 준비를 길게 하여 우리들을 기다리게 하는 그녀.


 '식성이 맞지 않았다.'

향신료 냄새는 경련이라도 할 듯 질색을 했고, 낯선 음식에 거부감이 있었다. 느끼한 음식도 못 먹었다. 그렇다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서부터 먹을 만한 것을 챙겨 온 것도 아니었다. 낯선 나라의 음식은 누구에게나 낯설고 일단 두렵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외국을 여행할 때 그 나라 사람들의 정서나 일상을 체험하는 가장 큰 것은 역시 음식이 아닐까. 그 나라에 가면 일단 그 나라의 음식을 먹어 볼 일이다. 먹고 뱉어내거나 토하더라도 일단 시도해 보는 것이 외국 여행의 재미이며 깊은 인상을 남기는 한 부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먹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드는 그녀가 이상했다. 그럴 거면 집에서부터 볶은 김치며 구이김 같은 것을 싸왔어야 하지 않을까?   


단풍이 절정인 산에 쌓인 눈을 보며 신의 흔적일까 생각한다. 기쁨과 경이로움으로 넋을 잃고 보는 설경. 올해 첫눈이다.

 '여행지에 자신의 직업이나 가정의 근심거리를 가지고 온다.'

 K는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다. 회사에서 대표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그녀의 권력을 보며 우리는 '비선 실세'라고 놀리곤 한다. 똑똑하고 정확한 일처리와 영민함이 그녀의 이미지였다. 한편으로 그 때문에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그녀를 딱하게 여기며 뭐든 도움이 되어 주려고 살피곤 했다. 자신에 대한 긍지도 높고 일과 가정을 완벽하게 유지해 나가는 일에 열정을 다하는 그녀가 후배였지만 멋있었다. 하지만 휴가는 일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기본인데 그녀는 휴대전화를 로밍을 해왔다. 그리고 수시로 남편에게 전화를 하여 확인을 하는 한편 회사 일로 통화를 하곤 하였다. 당장 갈 수도 없는 곳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열 받아서 씩씩거리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통화를 마친 그녀의 푸념과 하소연을 듣고 있어야 했다.


 '여행의 목적이 너무 다르다.'

나는 귀한 휴가를 내어 여행을 왔으니 여행을 100% 즐기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을 온 모양이다. 나는 여행지에서는 편한 옷과 신발을 선호한다. 하지만 사진에 잘 나올 만한 멋진 옷과 모자, 선글라스와 가방을 풀 장착한, '7년 만의 외출'에 나오는 메릴린 먼로를 연상케 하는 그녀와 함께 다니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적도 선상의 나라에서 디너쇼를 보러 갔을 때 나일론 안감이 붙은 봄가을용 원피스를 입고 더위를 참으며 땀을 흘리느라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화가 나서 앉아 있던 그녀를 잊을 수 없다. 그 옷은 사진이 잘 나오는 빨간색 원피스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 수시로 빈번하게 포즈를 요구하는 그녀가 짜증 났다. 그녀는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며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결국 우리가 함께 여행했던 곳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인터넷 검색을 한다.


 '현지인들에게 팁을 주는 일에 인색하다.'

1달러로 한 끼를 해결하는 현지인들은 여행객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1달러로 생활을 유지한다고 한다. 1달러면 우리에겐 짜장면 한 그릇 값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껌값'이다. 분리배출로 재활용도 되지 않는 조악하고 쓸모없는 기념품은 사면서 유난히 현지인들에게 주는 1달러 팁엔 인색했다. 마음이 아팠다.


 '부부동반 여행을 하는 경우 수시로 배우자와 다투었다.'

모두가 불편해하는데 배우자에게 험한 말을 하거나 인격을 깎아내리는 말로 공격을 해대는 통에 함께 간 이들이 눈치를 보아야 했고 분위기가 자주 망가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른 이들이 잔디를 깎거나 풀을 뽑거나 다른 뭔가 협동이 필요한 일을 할 때 협력하지 않거나 뒤늦게 발동이 걸려 싫다는데 억지로 술을 권하거나 소음을 유발하는 진상이기도 했다. 정말로 함께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절대로 몰랐을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과 습관들이었다.


 올해 첫눈의 낭만을 만끽했다. 단풍이 절정인 강원도의 영월 산속 마을은 깊은 가을 안으로 슬그머니 겨울이 들어와 있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퇴근길 도로 사정을 염려하지 않고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 만인가. 겨자색 짙은 낙엽송의 숲에 쌓인 눈이 마치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는 듯 행복했다. 그녀는 회사에서 걸려 오는 전화기를 내내 붙들고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내 여행을 네가 망치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엔 너와 같이 여행은 하지 않으리라. 아니, 코로나19 유행 시대가 어서 끝나서 너와 함께 가도 좋으니 비행기를 타고 어디라도 여행을 떠날 수만 있다면 참고 한 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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