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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Nov 15. 2021

강화 사람의 소울푸드, 순무 김치

그리운 기억을 켜는 스위치

도시에서 행복하게 택시 운전을 하고 있는 친구가 며칠 전 불쑥 전화를 했다. 우린 서로 다른 초등학교를 나와 함께 자란 친구는 아니지만 그는 나의 친구의 친구였다가 나와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고 생각을 공유하며 찐 친구가 되었다.

"친구! 별일 없이 잘 지내지?"

"난 네가 보고 싶어서 하도 울었더니 눈이 좀 짓무른 거 외엔 무탈하지"

"하하하... 역시 한결같이 에너지 넘치는 자네가 참 좋아"

"자네도 별일 없지?"

"그럼~ 딴 게 아니고, 혹시 순무김치 담가 파는 곳 아는 데 있나?"

친구의 물음에 공연히 미안함이 신물 올라오듯 한다.


 해마다 수확철이 시작되면 진료를 받으러 오시는 어르신들이 농사지은 것 맛이나 보라며 고구마를 시작으로 콩이며 쌀, 무와 배추 그리고 대파와 쪽파, 순무, 마늘 등을 저마다 검정 봉지에 담아 들고 오신다. 꼬부라진 허리로 가까스로 지은 농산물이니 어린아이 손에 들린 과자 빼앗는 느낌이 들어 그 애처로움에 몸 둘 바를 모르지만 주시는 마음을 알기에 감사하게 받아 잘도 먹는다. 그런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이상 기후 현상의 피해로 무엇이든 작황이 좋질 않다. 특히 무와 배추는 김장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여유 있게 심어 필요한 이들과 나누던 미덕을 찾기 힘들 지경이다. 지난주엔 세 판이나 심은 배추밭이 '무름병'으로 초토화되어 김장 걱정을 하시는 80세 어르신을 위해 절인 배추를 대신 구매해 드렸을 정도이다.


 "올해는 순무가 밑이 들지 않아서 집집마다 다들 난리야. 지금 정도면 이집저집 한 포대씩 순무를 주셔서 김치를 몇 번이나 담갔을 텐데 올해 한 뿌리도 안 들어와서 나도 올해는 순무김치를 담지 않고 그냥 패스할까 하는 중이야."

사실을 말하는데도 말을 더듬는 나의 마음도 당최 편편찮다. 사실 해마다 순무가 몇 포대씩 들어오면 농사지으신 어르신들 노고를 생각해서 한 알도 그냥 버리지 않고 그걸로 죄다 섞박지를 담가 필요한 이들에게 조금씩 맛보라고 나누곤 했었다. 많은 이들이 맛있게 먹어 주는 것이 보답이라 여기는 때문에 그 수고를 망설이지 않는다.

"응, 그래? 그렇구나... 아는 형님이 순무김치를 사달라고 하셔서 나도 같이 사 먹으려고"

"그렇구나. 미안해서 어째..... 내가 아는 동생이 시어머니하고 같이 풍물시장에서 김치를 담가 파는데 거기 연락처를 줄테니까 통화해서 주문해봐"

"그래, 그래. 역시 너한테 얘기하면 해결될 줄 알았어. 고맙다."

"고맙긴... 안전 운전하고"

"그래, 또 연락할게. 고맙다."


 강화 사람이라면 김장철 초입에 배추김치를 하기 전에 담그는 순무 섞박지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순무는 자색이 돌고 단단하고 배추 뿌리 맛이 난다고도 하지만 맛을 음미하다 보면 인삼 맛이 돌고 단맛과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남도 사람들은 순무 특유의 향 때문에 싫어하기도 한다. 친정어머니는 충청도 산골마을 아기씨 출신으로 강화가 고향이신 아버지를 위해 밴댕이까지 넣어 해마다 순무 섞박지를 담그셨지만 당신은 단 한 입도 드시지는 않았다. 엄마는 지금도 냄새가 싫다고 순무김치를 안 드신다. 남편은 신라 사람인지라 결혼하고 강화에 살면서도 거의 십 년 가까이 순무김치를 안 먹었다. 나는 내가 먹으려고 해마다 순무김치를 담갔는데 지금은 남편도 즐겨 먹게 되었다.


 순무는 강화, 김포, 황해도 연백의 특산물로 동의보감에도 나올 정도로 좋은 식품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순무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쉰무우 또는 만청(蔓菁)이라 부르고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달며 독이 없다. 주로 오장의 기운을 잘 통하게 하고, 음식을 잘 소화시키고 기를 내리고 황달을 치료하며 소변을 잘 나오게 하며 몸을 가뿐하게 해 주며 기운을 더해준다. 순무는 봄에는 싹을, 여름에는 잎을, 가을에는 줄기, 겨울에는 뿌리를 먹는다. 순무는 오래 먹어도 유익하기만 하고 무해하다.] 특히 순무의 씨앗은,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귀한 식품으로 죽을 쑤어 임신한 왕비나 병환 중인 왕대비에게만 공급했다고 하고 순무 짠지와 순무 짠지무침이 입덧에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 역시 첫 아이를 임신하여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못 먹었던 여름 내내 이웃집에서 담가놓은 순무 짠지 한 독을 내가 다 얻어다 먹으며 입덧 시기를 무사히 보냈었다.


 강화에서 나는 순무는 김포나 다른 지역에서 재배가 되더라도 맛이 다르다. 다른 지역에서 자란 순무는 그 특유의 맛이 없다. 그러니 강화를 떠나 오랫동안 객지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는 항상 생각나는 음식 중 하나가 강화에서 나는 순무로 담근 순무 김치이다. 몇 년 전 남편과 둘이서 베트남을 여행하려고 계획할 때 베트남으로 이주하여 호찌민 시에서 이십 년 동안 살고 있는 친구에게 미리 연락을 한 적 있었다. 친구는 몹시 반색을 하며 무조건 만나고 싶어 했다.'먹고 싶은 것 없느냐'라는 나의 물음에 친구는 어렵게 내게 부탁했다. '시장 순대와 순무김치' 그리고 여행 가방에 싸가지고 간 순무김치를 받아 들고 신이 나서 집으로 간 친구는 그 당장 라면을 끓여 순무김치 한 그릇을 다 먹었단다. 엄마 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시고 아내가 강화가 아닌 지역 출신인 남자 친구들은 순무김치를 맛 볼 기회가 거의 없다. 그들은 마치, 지금은 안 계신 어머니를 그리듯 순무 김치를 그리워한다. IT기업의 CEO인 친구는 생 순무 좀 구해 달라고 내게 부탁을 하기도 했다. 순무를 묻어 두었다가 겨울 긴 밤에 날로 깎아 먹으면 참 달고 시원하다. 그 맛이 절실히 그리웠던 친구에게 택배로 순무를 보내 주기도 했다. 미국 지사에 가 있는 친구는 순무김치와 막걸리가 먹고 싶다고 한다. 몇 년 전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강화에 올 일이 없어진 후배는 다른 건 다 사 먹을 수 있는데 순무김치는 사 먹기 싫다고 한다. 직접 담근 맛과 다르단다. 그래서 해마다 친정 언니가 없는 그녀에게 내가 순무김치를 담가 보내준다. 심지어 강화 사람이 아니지만 나로 인해 우리 시댁 가족들과 SNS를 통해 인연이 된 대전에서 인권 변호사로 일하는 동생에게도, 수원 사는 가수 친구에게도 내 순무김치가 택배로 조금씩 전달된다. 그렇게 맛 본 순무김치는 때 되면 생각나는 시원한 맛으로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전실이 있다.(웃자는 말)


 올해는 순무김치를 담지 않을 생각이었다. 순무가 한 뿌리도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밑이 들지 않아 제일 커봤자 아기 주먹만 한 순무 김치를 담가봤자 가족들 나눠 먹으면 그만이니 나한테까지 순서가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묵은 순무김치를 큰 멸치를 잔뜩 넣고 된장을 한술 풀어 푹 지지면 그 구수함은 밥도둑이 무색하니 그냥 묵은 순무김치를 먹으며 서운함을 달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난주 어느 날 내소 하신 부녀회원께서 진료소 벽에 걸린 수수비와 갈대비를 보며 놀라신다.

"어머! 이거 우리 아버지가 만드신 건데!?"

"아! 그 어르신 따님이세요?"

"네~ 아버지가 요즘 빗자루 만드시는 재미에 빠지셨어요. 어머, 우리 아버지 이거 아무나 안 주시는데?"   

잠 안 오는 긴 밤을 수수와 갈대를 엮어 비를 만드셔서 가져오신 어르신의 솜씨 구경하세요~

 비를 손수 엮어서 내게 가져다 주신 어르신의 따님은 '아버지가 보건소 다니신다고 해서 집 앞 면 보건지소 다니시는 줄 알았는데 여기 다니시는 줄은 몰랐다'며 '아버지가 소장님 얘기를 많이' 하셨단다.

"아버지 얘기 잘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매년 농사철엔 내려와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고 겨울엔 도시에 있는 집으로 간다는 따님은, 본인 아버지와는 매일 싸운다고 하시지만 내게는 아버지 잘 부탁한다며 앉아서 대화를 나누던 끝에 김장에 쓸 무와 대파 등을 주고 싶다고 시간 내서 집으로 오란다. 초면이라 민망하여 망설였는데 오후에 '어서 오라'라고 어르신께서 전화를 하셨다. 알고 보니 어르신의 집은 우리 면 보건지소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나이 어린 공중보건의사가 80이 넘으신 어르신의 긴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긴 쉽지 않았겠다......


 인심 좋은 어르신을 닮으신 따님이라 그런지 인심이 너무 넘치셨다. '제발 그만!'이라는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자꾸만 순무와 무, 그리고 쪽파와 대파를 뽑아 주신 덕에 그날 밤 12시까지 순무를 다듬고 씻어 청청한 이파리엔 소금을 솔솔 뿌려 절이고, 순무는 납작하게 썰어 비닐을 덮었다. 그렇게 순무김치 담글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이걸 먹어야 올 한 해를 무사히 넘길 강화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해 본다. 많진 않지만 맛이라도 보아야 행복해지는 소울 푸드는 꼭 먹어야 한다.  

강화 사람은 순무김치를 먹어야 행복해진다. 순무 섞박지는 강화 사람들이, 지금은 안 계신 엄마를 떠올리고 고향 마당과 학교 운동장, 친구들을 기억하게 하는 스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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