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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Nov 23. 2021

남편 없이 2박 3일

남편이 부산으로 출장을 갔다.

 남편은 부산에 간 김에 상주 어머니 집에 들러 하루 자고 오겠다며 2박 3일 일정으로 집을 떠났다. 시어머니의 생신이 다음 주지만 코로나 감염증으로 다 함께 모이는 것은 어려우니, 혼자 가서 미리 어머니를 뵙고 하루 자고 오겠다고 했다. 고단한 장거리를 말동무 없이 혼자서 운전하며 가야 하는 남편이 딱하고 염려되었다. 하지만 남편은 '혼자 여행하듯 슬슬 가면 돼. 나 그런 거 좋아하잖아'라며 가방에 이것저것 꾸렸다.


 자고 일어나니 남편이 없다. 내가 깰까 봐 어느 틈에 슬그머니 혼자 챙겨 새벽길을 나선 모양이다. 미안함이 스윽 얼굴을 스친다. 토요일 아침 집 안에 강아지와 나, 단 둘 뿐이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빛은 조용히 곱고 길게 거실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있었고 세상 모두는 나를 위해 숨 죽인 듯 고요했다. 그 순간의 느낌은, '음....... 뭐랄까....... 샬롬?'

'샬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샬롬은 자신의 무화과나무 아래 평안하게 누워 있는 상태를 뜻한다고 들었다. 남편이 2박 3일 집에 없는데 최적의 평안함을 느끼다니 뭔가 이상하다. 근심 걱정이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다. 왜지?

이런 풍경을 좋아한다. 샬롬....

 아내가 이런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남편은 몹시 당혹스럽고 서운하겠지만 최근 들어 남편과 함께 있으면 공연히 답답하고 불편하고 거슬린다. '완경'과 함께 겪는 약간의 갱년기 증상이겠지 하지만 내게 이런 '병'이 생겼다는 것은 남편에겐 비밀이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그리 된다. 이미 친정 언니가 이태 전 겪은 일이라 '나도 곧'이라 예상은 했지막상닥치니 적잖게 당황스럽다. '응답하라 1988'에서 치타 여사가 걸렸던 그 병인가 보다..... 남편은 콩쥐이고 나는 팥쥐가 된 느낌, 오직 아내만 바라보는 이런 사랑꾼 남편이 없는데, 남편이 며칠 없다는 것 때문에 샬롬을 느끼는 나는 뺑덕어미 같은 불량 아내라도 된 걸까?


 주말에도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호텔식 브런치와 진한 커피를 준비했다. 빵과 베이컨을 굽고 과일을 깎고 수란을 만드는 것이 귀찮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보고 싶은' 채널의 TV를 켜고 혼자 앉아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었다. 좋았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이것저것 늘어놓은 주방 정리를 했다. 햇살이 조용히 길게 창으로 빛을 드리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느리게 움직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남편의 출근용 가방과 마스크와 운동할 때 가지고 나가는 장갑과 묵주 그리고 손바닥 지압기 등을 싹 치웠다. 깔끔하니 좋았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지만 밥을 차려야 하는 걱정 없이 외출을 했다. 친구가 운영 중인 꽃집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좋았다.

나는 언제 꽃이었을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에 잠겨 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좋았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것, 집에 가도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잤다. 소파에는 주로 남편이 있거나 주말에 집에 온 아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볼 겨를도 없이 주말을 보내곤 했다. 소파를 차지하고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다. 좋았다. 어둑해지는 바깥을 내다보며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신다. 그런 별 것 아닌 일이지만 사실 집에 있지만 물을 마실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천천히 물을 마시는 사소한 행동을 생각해서 한다는 것이 좋았다.


 남편도 없는데 같이 저녁이나 먹자는 친구의 전화를 거절했다. 혼자 있는 것이 이렇게 좋은데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국멸치 한 줌을 넣고 묵은지를 잘게 썰어 진하게 우러나온 국물에 소면을 넣고 끓이는 제물 국수를 끓였다. 소주 한 병도 땄다. 소주 한 병에서 겨우 석 잔만 마시고 남겼다. 내가 혼술 타입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도 좋았다.


 평온하게 흐르는 고요한 밤 시간이 좋았다. 내일 출근할 걱정도 없고 남편도 없는 주말이라니 마치 휴가를 받은 듯 느긋했다. 새벽까지 TV를 마음껏 보았다. 좋았다.

 

 졸리지는 않았지만 자려고 누웠다. 늘 내가 자던 자리에 누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없는데 뭐하러 그의 자리를 피해 눕는가. 몸을 굴려 가운데 딱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이런 날이 올 테지. 허전함으로 잠 못 들고 뒤척이는 날, 저녁을 지으면서 건조기에서 빼낸 빨래를 개키라고 시킬 사람이 없는 날, 분리배출을 함께 할 사람이 없는 날,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로 빡빡 힘차게 닦는 사람이 없는 날, 가스불 좀 끄라고 시킬 사람도 없고 울화통이 터지는 일을 함께 성토할 사람, 다리를 올려놓을 다리가 없는 날, 밥 하기 싫은 날 동네 고깃집에 가서 고기를 적당히 구워주며 마주 보고 앉을 사람이 없는 날, 비 오는 날 전을 부치는 동안 막걸리를 사 올 사람..... 함께 하지 못할 날, 그런 날..... 엎치락뒤치락하는 긴 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점점 고무줄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유령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새벽 4시가 되었지만 밖은 아직 한밤 중이었다. 베란다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멀리 점멸하는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저 신호등은 멈추라는 것일까? 아니면 가도 된다는 것일까.... 멈출 수도 없고 가도 되는지를 알 수도 없는 점멸등 신호처럼 나의 인생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지금처럼 가도 된다는 것인지 이쯤에서 멈추고 다시 한번 돌아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십 년 전의 나였다면 점멸등 앞에서 고민 없이 재빨리 내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일단정지하는 어른이 되었다. 살아오는 동안 남편 같은 친구를 얻지 못한 것은 나의 덕이 부족함 때문일까? 친구 같은 남편을 만났다는 것은 신의 은총일까.... 명백한 사실은 나를 위해 뭐든 기꺼이 해 줄 사람 하나는 내 곁에 있다는 것이다. 다행이고 감사하다.  


 남편은 무사히 돌아왔고 갔던 일은 아주 잘 되었고, 어머니도 무탈하시다고 했다. 남편 없이 2박 3일은 아주 빠르게도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남편이 없는 빈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가 먼저라고 장담할 수 없지만 사랑할 시간이 주어진 동안은 충분히 사랑해야지. 지금보다 더 잘할 자신은 없지만 최소한 낯 붉히는 일은 없도록 노력해야지. 함께 하는 시간이 답답하고 불편하고 거슬리는 일이 있다 해도 그것의 유혹에 빠져 그를 미워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뭐 그런 생각들로 나름 정리는 되었다.


 '결국 이 나이가 되면, 혼자여도 좋고 남편과 함께여도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된 2박 3일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마음가짐 이니라.'

남편 없이 2박 3일은 아주 빠르게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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