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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Nov 30. 2021

김장 보고서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 이상국 집'이라는 문집에 '무를 장에 담그거나 소금에 절여 먹는다'라는 기록이 김장의 공식 기록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김장의 역사는 30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한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들어왔으니 그 전엔 무나 배추 등을 소금에 절여서 저장해서 두고 먹었던 것이겠다. [농가월령가] 10월 편에, ‘무, 배추 캐어 들어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정히 씻어 함담을 막게 하소 양지에 가가(假家)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라는 구절도 나온다. 땔감도 식재료도 귀한 겨울에 길게 두고 먹을 채소라곤 김장김치뿐이었을 테다. 상상해 보면 짜기만 했을 무와 배추도 실은 없어서 못 먹는 귀한 음식이었겠다. 지금은 탐식의 시대.  '너 TUBE'에서 김장을 검색해 보면 지역마다 가정마다 김장 비법이 넘쳐나고 서로 제 것이 최고라고 저마다 떠든다.  

사실 입맛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아무리 최고의 요리사의 음식이어도 내 입에 안 맞으면 '맛없다'라고 한다. 내겐 지금도 친정 엄마표 김장이 내 입에 딱이다. 비법이 없는 것이 비법인 우리 엄마의 김장에는 들어가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북어대가리와 다시마, 양파와 대파를 넣고 끓인 육수에 찹쌀죽을 쑤어 새우젓과 멸치액젓, 갓과 쪽파, 대파, 마늘 생강을 찧어 넣고 고춧가루로 버무려 소금으로 간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걸 이십여 년 먹다가 처음 교동도로 신규 발령을 받아 와서 들통으로 가득 주신 김장김치를 맛보고 깜짝 놀랐다. 김치에서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났다. 익어도 그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김치를 버무리시는 분이 손을 씻지 않고 하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결국 통을 돌려드려야 해서 고민 끝에 야심한 밤에 진료소 뒷마당을 삽으로 파고 몰래 김치 한통을 모두 묻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실 그 냄새는 '고수' 냄새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교동도는 이북과 가까운대다가 이북에서 피란을 나오신 분들이 많아 고수를 즐겼다. 김치에 뭔가 다른 것을 넣는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지금 나는 고수를 못 먹는다, 없어서!


 결혼을 하고도 줄기차게 엄마의 김장을 퍼다 먹었다. 어쩌면 그 맛이 그리도 한결같이 '바로 이 맛일까!'우리 엄마의 손맛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시댁인 상주에서 주신 김치는 두고두고 뒀다가 김천이 고향인 직장 동료에게 싸 주었다. 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그 짭짤한 김치를 '바로 이 맛!'이라며 기뻐하던 그 직원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엄마의 김장 김치를 못 먹게 될 날이 올 거란 생각은 해보지도 않던 몇 년 전 어느 날 엄마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거동불편자가 되었다. 폐를 다친 엄마는 방에서 주방까지를 100미터 달린 사람처럼 숨차 하셨다. 그 해 김장을 처음으로 내가 했다. 엄마 집 마당에서 배추를 절여 오고 엄마를 모셔다가 거실 소파에 앉히고 맛 감별을 받아가며 완성한 김치를 엄마에게도 한 통 드렸다.

'얘, 어쩌면 내가 한 거란 맛이 똑같다!'

엄마의 평가에 나는 전교 1등 해서 칭찬받은 것보다 기뻤다.(전교 1등을 해보진 못했다.) 물론 엄마를 모셔다 앉혀 놓고 코치를 받긴 했지만 엄마 김치랑 맛이 똑같다고 나도 느꼈고 아이들도 그랬다. 신기했다.


 얼결에 첫 김장을 성공리에 마친 것에 고무되어 그 이듬해는 자신만만하게 김장에 임했었다. 아파트 욕조에서 절인 배추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배추를 싸주겠다고 저마다 고무장갑과 앞치마를 두르고 온 친구들과 동생이 든든한 일꾼이었다. 그러나 김장에 대한 정확한 방법이 숙지되지 않은 나는 이솝 이야기에 나오는 [나귀를 메고 가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이 사람 저 사람의 훈수에 휘둘렸다. '짜다, 싱겁다'와 고춧가루를 '더 넣어라 그만 넣어라' 훈수는 그 해 김치를 완전히 망치게 만들었다. 덜 빨갛다는 동생의 의견에 고춧가루를 계속 부어댔더니 김치가 텁텁했다. 소금을 더 넣고 더 넣다 보니 무를 숭숭 썰에 가장자리에 박아야 할 정도로 짭짤했다. 게다가 일꾼들 밥을 해 먹이느라 김장에는 제대로 집중도 할 수 없었다. 시행착오로 망친 김치는 겨울 내내 두고두고 먹을 때마다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그다음 해는 절대 누구의 훈수가 아닌 내 입맛에 맞추겠다고 단단히 각오를 했다. 그러나 이상 기온 현상으로 고춧가루가 4kg에 이십만 원을 호가했다. 김장에 임하는 나의 마음이 위축되었다. 게다가 배추를 자기 집 마당에서 절여서 가져가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하는 친한 언니의 말을 순진하게 그대로 따랐다가 손발이 떨어져 나가게 추운 새벽에 남편과 둘이 언니 집도 아닌 언니네 이웃 캄캄한 남의 집 마당에서 배추를 씻는데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이듬해부터 강원도 영월의 고랭지 절임 배추를 사서 쓰기 시작했다. 김장의 혁명이었다. 양념을 만들어 배추를 싸기만 하면 되는 것은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일꾼도 많이 필요 없었다. 내가 배추를 한 개 쌀 때 세 개를 싸는 손이 매우 빠른 나의 절친 한 사람과 통을 옆에 놓아주거나 우거지로 얌전하게 김치를 덮어 통에 묻은 양념을 닦은 후 뚜껑 닫는 일, 그리고 양념을 한 바가지씩 퍼서 그릇에 넣어 줄 딸만 있으면 오전에 뒷정리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저녁에 가족 같은 친구들을 불러 보쌈과 삭힌 홍어로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누는 것으로 김장 잔치는 끝났다. 삭힌 홍어가 우리의 김장 밥에 뛰어들게 된 사연은 나중에 재미있게 풀어 보고 싶다. 어쨌든 그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나는 올해 드디어 최적화된 김장의 과정을 완성을 하게 되었다.

올해는 맛으로나 방법으로나 나만의 정점을 찾았다고 생각된다. 


 어느 해는 김장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김치냉장고 서랍에 얌전히 숨죽인 채 들어앉은 간 마늘과 생강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수능 시험을 보고 나와서 답을 맞혀보며 시험을 잘 봤다는 사실에 감격하다가 한 칸씩 밀려 썼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수험생이 이런 마음일까.... 


 생각해 보면 이제 더 이상 김장은 하지 않아도 크게 사는데 불편함은 없을 수 있다. 지난여름 끝에 묵은지가 떨어져 온라인 쇼핑몰에서 묵은지를 5kg 샀는데 묵은지의 맛이 나의 선입견을 깰 정도로 맛이 좋았다. 보관 상태도 얼마나 좋았던지 김치찜을 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게다가 김치가 예전처럼 빨리 없어지지 않는다. 딸아이들이 회사 생활을 하니 학생 때처럼 집에서 밥을 해먹을 시간이 많지 않아 김치를 덜 가져간다. 나 역시 남편과 둘 뿐이니 집에 함께 앉아 밥을 먹는 날이 잘해야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이다. '내년부터는 김장하지 말자'라고 결심도 해 본다. 배추며 무의 생육에 불리한 기후로 변화하는 환경도 김장을 포기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배추도 비싸고 품질도 떨어진다. 김치가 벌써 물렀다는 이들도 속출한다. 


 그러다가 스산한 바람이 불고 가을비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면 또 마음이 조급해진다. 절임 배추를 예약하라는 문자가 오면 김유신의 말 같은 나의 손가락이 저절로 배추를 신청한다. 그때가 되면 '몇 박스'를 할 것인가가 고민이지 '할지 안 할지'는 고민이 아니다. 금방 꺼낸 아삭한 김치는 양념이 잘 베어 들어 감칠맛이 침샘을 강렬하게 자극하고 금방 지은 밥에 잘 익은 김치를 쭉 찢어 올려서 입 안에 넣을 때의 첫맛은 김장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절여진 배추 한 앞을 걸쳐놓고 촉촉하고 달큼한 양념소를 살짝 얹고 쫀득하게 잘 삶아진 수육 한 점을 얹은 후 배추로 돌돌 말아 입 안에 넣으면 세상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맛본다. 살가운 이들과 함께 막걸리 잔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주는 덕담의 힘으로 맞는 겨울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매일 똑같은 사람들보다 훨씬 따뜻한 마음으로 든든하게 맞을 수 있게 해 준다. 


 김장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단순히 반찬 중 하나를 뛰어넘어 그 자체로 문화이다. 중국이 김치를 자신들의 고유문화라고 우긴다. 김치가 좋은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며 제 것이라고 우길까. 중국 사람들은 이익을 보는 타고 난 눈을 가졌다. 그들이 제 것이라고 우기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절대 그들에게 뺏기지 말자. 그러려고 나는 분명하게 이 김장의 문화를 내 두 딸아이와도 나누고 전달할 것이다. 그걸 이어받아 자유롭게 구사하게 될 때까지 함께 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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