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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Dec 16. 2021

그쪽 출신이신가 봐요?

그쪽 출신 아닌 사람도 생각나는 맛 홍어

 '그쪽 출신이신가 봐요?'

홍어는 누가 내 코를 콱, 쥐어박은 것처럼 눈물이 핑 돌고 먹고 나면 입안이 벗겨지도록 푹 삭힌 것을 좋아한다고 내가 말하면 자동으로 나오는 반응이다. 그들이 말하는 '그쪽'은 호남을 뜻한다. 지역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진 꼰대 중에서 주로 그런 묘한 표현을 사용한다. 나로 말하지만 강화도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찐' 강화년이다. (옛날에 전국 연날리기 경연대회를 하면 늘 강화 대표가 우승을 했다는 것에서 유래하여 '강화년 뻔뻔이'라는 말이 생겼다. 극성맞을 만큼 생활력 강한 강화 여자들을 빗대어하는 말로도 쓰인다.)


 내가 '그쪽 출신'도 아니면서 삭힌 홍어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의외로 자신이 세상 제일 멋진 여자로 착각하며 7센티 굽의 하이힐만 신으며 살던 20대 초반이었다. 보건진료직 신규 직무 교육을 함께 받은 동기의 결혼식이었고 호남 출신이던 신부 측 피로연 자리였다. 집에서 담가 올라온 농주와 묵은지 그리고 삼겹살 수육과 삭힌 홍어를 처음 맛보았다. 한여름 재래식 화장실 문을 열면 달려드는 암모니아 냄새에 코를 공격당하자마자 눈물이 핑 돌고 속이 뒤집혔다. 놀랐다. 이런 걸 먹다니..... 그러나 용기를 내어 입에 넣고 씹었던 홍어 때문에 내 입 안은 너덜너덜해졌다. 며칠 뜨거운 걸 먹을 수 없었던 그 낯선 음식에 대한 불쾌감은 입 안이 다 아물도록 계속되었다. 


 결혼하고 4년 만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셨고 다시 4년이 흘렀을 때 아버님의 묘를 개장하는 사건이 있었다. 큰댁의 둘째 시숙의 사업이 망해 큰어머님이 절에서 곁방살이를 하게 되었고 남편의 둘째 형이 위암 수술을 했다. 이런저런 불행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던 참인데 중요하지 않은 내 생각으론, 그 모든 것이 잘못된 판단과 탐욕의 결과 이건만, 나의 둘째 시숙과 평소 친분이 있던 '지관' 선생께서 우리 선산의 묘들을 둘러보게 되었다. 시숙의 요청이었지만 긴 세월 호남의 지인들과 교류하며 얻어들었던 풍수지리에 사로잡힌 탓이었다. 지관 선생의 의견에 의하면 묘가 나쁜 중에 나쁘다는 것. 그에 따라 묘를 이장하고 싶다는 둘째 시숙의 원의를 존중하고 그를 위해 모두 한마음으로 동의하고 움직여 가족 전원의 찬성으로 아버님의 묘를 개장했던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하신 선생의 고견이니 나무랄 것은 없으나 누구도 묘를 잘못 써서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는 믿지 않으면서도 둘째 시숙을 위해 모두 희생을 하였다. 그렇게 아버님과 아버님의 모친인 시할머니 묘는 아무 연고도 없는 호남 땅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그 해 시댁 가족 모두는 어머니의 생신 겸 여행으로 호남 땅에 입성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호남의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 내온 선생님 댁의 만찬에 압도된 영남 사람들과 나는, 다시 만난 삭힌 홍어의 삼합을 보고 망설이는 남편에게 보란 듯이 그 음식을 잘 먹어 보여 주었다. 남편이 홍어와의 첫 만남에서 입안이 죄다 헤지던 그날 선생의 댁에서 재회한 홍어에 나도 남편도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김대중 선생'께서 단골로 오셨었다는 홍어집에 가서 부탁받은 홍어와 우리가 먹을 홍어를 두 마리를 샀다. 그때 처음 알았다. '카니발' 바닥에 싣고 6시간을 한 겨울 고속도로를 히터를 켠 채 달리면 안 된다. 차에 밴 홍어 냄새가 사라지질 않았다. 차를 타는 사람들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또 처음 알았다. 냄새를 없애는 가장 최고의 방법은 '쑥'을 피우는 것이다. 누군가가 알려 준 대로 강화 풍물시장 약재상에 가서 '사자발쑥' 오천 원어치를 사다가 스테인리스 그릇에 넣고 차 안에 쑥을 피웠다. 거짓말처럼 홍어 냄새가 사라졌다. 물론 쑥 냄새도 며칠이 걸리긴 했지만 사라졌다. 어쨌든 따뜻한 차 안에서 6시간 동안 더 삭은 홍어는 호남 출신 이웃이 먹으면서 감탄할 정도로 맛이 좋았다. 그 해 이후로 우리는 그 정도로 맛있는 홍어는 먹어 보지 못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해마다 김장과 일주일 전에 미리 홍어를 주문할 정도로 삭힌 홍어 마니아가 되었다.     

    

 '삭힌 홍어'만큼 좋고 싫은 기호가 둘로 갈리는 음식도 드물지 않을까. 두 명 중 한 명은 반색하거나 아니면 질색을 하는 정도로 말이다. 내가 삭힌 음식 같은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것은 타고났다는 생각이다. 단군의 자손인 우리 민족은 지극히 자극적인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웅녀의 자손이 아니던가. 어쨌든 다행히 삭힌 홍어를 좋아하는 나는 다른 나라에 가서도 못 먹었던 음식이 드물었다. 삭힌 홍어 맛에 단련된 취향이니 당연하였다. 유일하게 못 먹었던 음식은 베트남 다랏 야시장에서 만난 '새 머리 꼬치' 정도이다. 중국에서 만난 '취두부'를 잘 구운 빵에 발라 먹는다거나 동남아에서 향신료로 요리한 음식들을 먹는 것은 일도 아니다.  


 삭힌 홍어를 좋아하는 내게 '그쪽 출신'이냐고 묻던 그분처럼 의외로 음식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역시 많이 존재한다. 지금이야 그런 편견과 선입견이 현저하게 줄었지만,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는 군대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선임이 호남 출신이었고 군대에서 매일 콩나물국이 나왔다고 해서 호남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콩나물이 상에 오르면 화를 내셨었다. 엄마는 이유 없이 호남인을 폄하하고 영남 사람들을 우대했다. 특정 세력들이 조장했던 여론에 길들여진 탓이겠다. 시어머님은 처음 인사를 갔을 때 대선 주자였던 김대중 대통령님에 대해 '빨갱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나라 걱정을 하셨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중엔 호남인들이 많다. 전라도 광주에 살는 동생은 내 친정아버지 초상 때 알지도 못하는 제 형님을 대신 조문 보내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사병들과 긴 세월 함께 했던 영남인인 남편도 호남 출신 병사들에 대해 큰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뭐든 빨리 배우고 배운 것을 빨리 더 확대 발전시키는 능력이 있으며 두 말할 것 없이 일처리를 하니 믿고 맡기기 좋다'라고 칭찬했다. 십 년도 넘게 호남에서 공수해 온 김치를 얻어먹는 친구도 음식에 있어서는 단연 호남과 호남사람들에 대해 엄지를 치켜세운다. 


 사람이든 음식이든 일단 겪어야 한다. 겪기 전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지이다. 그것도 자꾸만 여러 번 겪어 보길 권한다. 직접 겪지 않았거나 여러 번 겪지 않은 일에 관한 선입견이나 편견은 우리 삶을 반 만 살게 만든다. 당연히 행복도 반으로 줄겠다. 첫 만남에서 불쾌하게 언쟁을 하거나 맞부딪쳤던 사람과 오히려 더 친해지는 일도 많다. 사람도 음식도 앞에 놓고는 일단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이다. 비린 음식을 싫어하는 나는 싱가포르 인도인 마을 로컬 음식점에서 맛보았었던 '생선 머리 커리'가 기준이 되었다. 그걸 주문해 드시는 분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내게 한 입 먹어보라고 했을 때, 분명 비릴 거라고 의심했지만 순간 선입견을 버리고 세상 가장 비린 음식을 입에 넣어 보았다는 것은, 내가 기꺼이 선입견을 던지는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아주 큰 경험이 되었다. 음식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이들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다. 음식 안에 그들의 문화와 정서와 기호와 삶을 대하는 자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찬 바람이 도는 이 계절엔 들큼한 막걸리와 삭힌 홍어 그리고 보들보들한 수육과 푹 익은 묵은지의 오묘하고도 감칠맛 나는 그 맛이 늘 생각난다. 누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건, 그 음식이 온 곳의 출신이냐 묻지 말고 다양한 세상의 모든 귀한 존재들에 대한 호기심과 존중을 지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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