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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Dec 14. 2021

엄마도 운다

엄마가 울지 않는 이유

 초등학교 4학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이웃집에 마실 가신 엄마를 따라가 마루에 앉아 있었다. 친구네 아빠셨던 집배원님이 전보를 가지고 이웃집까지 엄마를 찾아오셨다. 전보를 받아 읽으시는 엄마의 표정은 내가 본 중에 가장 어색했다. 뭐랄까, 그땐 몰랐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웃고 있지만 굳어 있던 이상한 얼굴의 엄마는, '친정 오빠가 돌아갔대...'라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하시고는 급히 일어서서 집으로 달려가셨다. '친정 오빠'는 외삼촌인데,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도 얼결에 엄마의 뒤를 따라 집으로 갔다.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가 아랫목에 주저앉아 곧바로 벽에 얼굴을 대고 엉엉엉 소리 내어 우셨다. 엄마가 소리 내어 운다. 엄마도 우는구나..... 그때까지는 어른이 소리 내어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본 적 없었다. 내겐 놀라운 일이었고 그 광경은 충격이었다.


 엄마는 유난히 우는 걸 싫어하셨다. 울면 더 혼났다. 소리 내어 울면 '청승맞게 운다'라고 화를 내며 매를 드셨다. 야단을 맞을 때는 억울하고 서러워 당연히 눈물이 나는데 울면 더 혼나니 울음을 참아야 했고 울보인 나는 울음을 참는 것이 매를 맞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그날 이후로 엄마가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심지어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나는 엄마에게 '영감 죽었는데 표정 관리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우?'라고 할 정도로 엄마는 울기는커녕 흐뭇하게 넘쳐나는 손님들을 지켜보셨다. 내가 물었었다.

"엄마, 옛날에 외삼촌 돌아가셨다는 전보받고 그땐 왜 그렇게 우셨어? 나는 엄마가 소리 내서 우는 걸 그때 처음 보았어요."

"그랬나? 몰라 기억 안 나..... 그때는 고생만 죽도록 하고 죽은 큰오빠도 불쌍하고, 서모 밑에서 설움 받았던 조카들도 불쌍하고, 오빠 없이 올케랑 둘이 살아야 하는 너희 외할머니 불쌍해서 울었겠지....."

내겐 충격적이었던 엄마의 통곡이 엄마에겐 기억이 나지 않는 그저 지나간 순간 중 하나였을까. 친정 엄마는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실 때, 친정 소 판 돈을 얻어다 쓰고 갚지 못했던 죄로 친정에 편히 드나들지 못했었다. 내 기억으로도 어린 나를 외가에 잠시 맡길 때도 엄마가 아니라 이종 언니를 따라갔었고 엄마는 외삼촌과 외할머니, 그리고 작은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초상을 치르러 가셨던 것이 전부였다. 세월이 흘러 둘째 외삼촌의 장남이 결혼했을 때 엄마는 조금 큰돈을 축의금으로 내며, '그때 소 판 돈 갚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하셨다.


 "니들이 맨날 울기만 하면 팔자 사나울까 봐 그랬지....."

왜 울면 더 때렸냐고 엄마에게 물었을 때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았어, 울면 맨날 울 일만 생기는 겨...."

하지만 엄마의 나날들 중 울 일이 생기지 않은 날은 많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엄마가 환갑이 지나도록  엄마의 하루하루는 울고 싶도록 고단하고 힘겨웠다. 나였다면 매일 울었을 그런 날들을 엄마는 '이를 악물고' 참아내셨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막내아들의 결혼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관광버스 안에서 애창곡인 '잃어버린 삼십 년'을 그럴듯하게 개사해서 부르셨다. 엄마의 개사 실력에 놀라 작가인 나도 감탄을 했다. 그때는 그것이 즉석 개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노래를 부를 기회가 되면 엄마는 항상 그 노래를 부르셨다. 그것은 엄마의 마음에 새겨진 가사였다. '어머니~ 덕디 아주머니~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게 불러 봅니다~'라는 대목에서 앉아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물을 지었지만 엄마는 울지 않으셨다. '좋은 날 왜 우냐'라고 하셨다. 걸핏하면 우는 내게 '너는 감정이 풍부한 모양'이라는 엄마는 목석같은 여인이다. 아버지는 항상 엄마를 두고 그리 부르셨다. '목석' 아니면 '멋대가리라곤 없는 여편네' 또는 '나보다 더 남자 같은 벽창호'라고 불만을 터뜨리곤 하셨다.


 

 딸아이가 최근 어떤 '녀석'에게 받았던 상처에 대해 내게 털어놓았다.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랍고 기가 막혔지만 엄마에게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힘들었던 이야기를 해준 딸을 생각해서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너를 지켜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지혜롭게 잘 대처했다'고만했다. 주말을 집에서 지내고 서울로 돌아가는 딸아이를 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고 밝은 얼굴로 '다음에 오면 더 잘해줄게~ 또 놀러 와~'라며 손을 흔들고 차를 돌려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느라 정지했다. 고개를 들어 신호등을 바라보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의 보호 없이 낯선 도시에서 홀로 서서 버티는 딸에게 일어난 아찔한 사건에 대해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그런 일을 겪고 크게 상처 받았을 텐데 내내 잘 버티고 감정의 폭풍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마치 남의 일 전하듯 의연하게 엄마에게 털어놓는 딸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자꾸만 솟아서 운전을 하기 어려웠다. 가까운 마트의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세우고 감정을 추스르며 긴 시간을 멍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휴.... 나는 누굴 닮아서 이럴까......"

나는 어릴 때부터 잘 울었다. 평강공주처럼 걸핏하면 우는 울보였다. 그래서 가장 많이 혼났다. 어른이 되었고 응급실 간호사 시절의 '태움'도, 사귀던 사람과의 결별도, 결혼과 함께 찾아온 '시월드에서의 납득하기 어려운 모든 상황들'도 모두 눈물에 흠뻑 젖었다. 나는 태생이 울보다.


 생각해 보니 나도 울지 않았던 순간이 더러 있었다. '경기'를 하는 첫 아이를 안고 세상 가장 빠른 폭주로 차를 모는 남편 옆에 앉아 속도감도 느끼지 못한 채 응급실에 갈 때, 아이가 중간에 옮긴 유치원에서 왕따를 당할 때, 아이가 뇌수막염에 걸렸을 때, 담임에게 부당하게 벌을 섰다고 했을 때..... 그랬었다. 자식 일 앞에서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울면 아이들이 무서워할까 봐 울지 못했다. 자식을 위해 집중이 필요했던 순간에는 나도 목석이 되었다. 울지 않던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에겐 다섯 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나처럼 자식들 앞이라 울 겨를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 옛날 외삼촌의 부고를 받고 우리 엄마가 통곡했을 때 나는 무서웠었다. 엄마라고 울고 싶은 순간이 왜 없었을까. 우리 엄마는 자식이 다섯이니 혼자 몰래 울 시간도 장소도 없었겠다. 엄마가 울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엄마가 우는 걸 눈치채지 못해서 일지 모른다.  


 숲이 있다. 산의 자락이었다가 사람들이 후벼 파내어 길이 나고 마을이 들어서 산으로부터 오래전에 떨어져 나가 덩그러니 혼자가 된, 그 숲은 산이었을 때의 이름을 잊었다. 산이었을 때는 덩달아 울고 웃으며 자유로이 새들과 교류하던 때도 있었건만 이제는 스스로 울지는 않는다. 숲은 그저 혼자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엄마는 숲이다. 숲은 산처럼 깊지도 높지도 않아 나약한 것들이 깃들어 쉬고 잠시 스쳐가도 탓이 없다. 그래도 산처럼 물도 나고 나무도 새도 풀도 꽃도 다 가지고 있으면서 나가는 길과 들어가는 길이 모두 통해 있다. 꼭 우리 엄마를 닮았다. 나도 산으로 향하던 마음이 무디어진다. 나도 점점 숲이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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