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에는 팥죽
어쨌든 나는 아파도 죽은 싫어서 차라리 밥을 한 숟갈 먹는 사람이지만 동지를 앞둔 지난 주말에는 맘먹고 팥을 꺼내 담갔다. 매 해마다 동지에는 새알심이 든 팥죽을 쑤어 드시는 엄마가 동지라는 말만 들어도 얼마나 팥죽이 드시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충청도 양반댁 아기씨 출신으로 우리가 어릴 적부터 뭐든 절기와 명절에 먹는 음식은 꼭 챙기셨다. 설엔 가래떡과 만두를 꼭 하셨고, 정월대보름엔 자고 있는 우리들을 이른 아침 강제로 깨워 부럼을 깨물게 하고, 오곡밥과 나물을 산더미처럼 준비하셨다. 한여름 복날엔 **탕을, 추석에는 이불만큼 많은 떡 반죽을 앞에 놓고 둘러앉아 송편 빚기에 고사리 손까지 모두 동원되곤 했다. 어릴 적 나는 엄마의 그 일 년은 싫었다. 푹 끓여 퍼진 떡국이나 입에 설고 질척한 오곡밥이 싫었고 마른 나뭇잎을 씹는 것 같은 나물 반찬이 싫었다. 콩이 와글와글 든 송편이 싫었고 동지라고 국 대접으로 한 그릇씩 떠주는 뜨거운 팥죽이 싫었다. 하지만 엄마는 줄기차게 모든 절기와 명절에 먹어야 한다는 그 음식들을 손 크게 만들어서 우릴 먹이고 이웃에 퍼돌렸다.
친정 엄마는 75세에 교통사고로 늑골이 골절되면서 폐가 손상된 엄마는 중환자실에 세 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다 하시면 죽음 근처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이겨내신 이후로 목숨은 건지셨지만 호흡곤란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으며 사시는 중이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날 같다'라고 여전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계시지만 마음으로는 태산도 떠 매어 올 것 같은 엄마는 이제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 몸의 불편함은 엄마를 7년째 묶어 놓았다. 화도 나셨다가 울적하기도 하셨다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감사하기도 하며 자신의 무능해짐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다. 입이 아픈 것은 아니니 이런저런 먹던 습관이 든 음식들을 찾으셨고 함께 사는 동생도 나도 그런 것들을 찾아 만들어 엄마 앞에 내놓아야 했다. 안 그러면 엄마는 슬그머니 전동휠체어를 타고 시장에 나가 마을 사람 모두를 먹일 만큼의 재료를 사다 놓으시고 감당을 못해 바라만 보면서 화를 내곤 하셨다. 먹고는 싶지만 내가 만들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라는 것이 죄다 엄마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들이니 달리 도리가 없었다. 거기에 덧붙여 그걸 달게 드시는 엄마를 바라보는 마음이 또 그렇게나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먹이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것도 엄마 덕분이다.
쭉정이를 골라내고 담가 놓았던 팥을 깨끗이 씻어 우르르 한 번 끓여 첫 물을 버리고 압력솥에 넣고 삶았다. 시간도 절약되고 물도 보충하지 않아도 되니 압력솥에 팥을 삶으라고 알려 주신 분께 감사하며 손으로 살짝 뭉개면 으깨질 정도로 잘 삶아진 팥을 블랜더에 넣고 곱게 갈았다. 엄마는 지켜 서서 푹 삶은 팥을 일일이 채에 으깨고 뭉개어 껍질을 걸러내는 힘들고 고단한 공정을 거치느라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던 그 과정을 나는 후다닥 쉽게 해냈다. 곱게 간 팥을 솥에 넣고 묽어서 주르르 흐를 정도로 농도를 맞추어 소금으로 간을 한 후 팔팔 끓으면 익반죽 해놓았던 찹쌀 새알을 넣고 떠올라서 푹 익도록 끓인 다음, 미리 담갔다가 불린 맵쌀에 팥물을 넣고 갈아 놓은 쌀 물로 농도를 맞추었다. 내 입에 간이 딱 맞으니 분명 엄마도 "간도 딱 맞고 새알도 크기가 딱 좋다'며 '내가 한 거랑 맛이 똑같다'라고 하실 것이고 아주 맛있게 드실 것이다.
"이걸 어떻게 이렇게 할 생각을 하셨어요?"
'동지에는 팥죽'이라며 팥죽 한 그릇을 떠서 맛보라고 가져다 주니 아래층 사는 동네 동생이 그런다.
"나야 모르지, 우리 엄마가 그렇게 하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