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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Jan 04. 2022

천하무인(天下無人)

세상에 남이란 없다.

 새해가 되고 1월 2일 오후 늦게 문자가 왔다.

[베로니카 자매님, 신 아무개 글씨 달력 안 가져가실 거요? 벌써 365분의 2가 저물어 가는데.....]

3년째 고 신영복 선생의 시서화가 담긴 달력을 내게 주시는 81세의 친구로부터 온 문자를 받은 나는 '빨래를 개 놓고 건너가겠습니다.'라고 전화를 드렸다. 잘 익은 백김치를 두 포기 작은 통에 담아 단단히 싸서 종이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짧은 겨울 해는 저물어 이미 어둑한 길을 걷는데 알싸한 찬 공기가 옷깃을 후벼 판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길 건너 2차 단지에 사시는 아우구스티노 형제님의 집을 찾아가며 다시 또 헤맨다. '1,2라인? 아니! 3,4라인이었지.... 12층? 에고, 현관에 교우의 집 푯말이 없다. 이 집이 아니다! 13층이다.....' 올 때마다 이 모양이다. 지난여름 찾아뵙고는 몇 달이 지나갔다....


 참 이상하다. 청년 시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접한 이후 신영복 선생에 대한 존경과 흠모를 지니고 살던 내게, 그분의 시서화가 담긴 달력이 해마다 내게 온다. 생각지도 않았던 특별한 연말 선물이다. 나의 81세 친구 아우구스티노 형제님은 중국어를 전공하시고 오랜 세월 중국의 수많은 고전과 책들을 번역하는 일을 해오고 계시다. '최근 번역한 모옌의 책을 주고 싶다'시길래 3년 전 우연히 형제님 댁에 들렀을 때 형제님은 모옌의 장편소설 '열세 걸음' 앞장에 친필 사인을 해서 내게 건네시며 '이것도 필요하면 가져가시오' 하셨다. '해마다 출판사에서 이걸 보내주는데 나는 그 진보주의자의 글씨를 매일 바라보기가 싫다'라고 하셨다. 받고 보니 돌베개 출판사에서 보낸 고 신영복 선생의 시서화 달력이다. 형제님은 '신 아무개가 싫다'라고 하셨지만 나는 마치 잃어버렸던 유품이라도 받은 양 이 특별한 달력이 기뻤다. 내가 그리 좋아하니 형제님도 해마다 출판사에서 보내는 이 달력을 잊지 않고 내게 건네주신다. 우리는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 이상 중국의 글들을 번역하는 일은 그만두겠다는 노 작가의 말씀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중국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있다'라고 하신다.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된 중국은 더 이상 매력이 없다고도 하신다. 산더미같이 쌓인 원고들을 세절기로 파쇄할 예정이라고도 하셨다. 에휴.... 중국과의 국제 관계가 경색되어 요소수 사태가 나고 동북 공정이다, 김치며 한복이며 우리가 저희 문화를 훔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중국인들에게 좋은 마음을 갖기 힘들지만 노 작가의 절필과 같은 직접적인 폐해를 대하고 보니 이래저래 마음이 좋지 않다.


 집으로 돌아와 지나간 달력들을 다시 꺼냈다. 첫 해에 받은 달력을 넘겨보며 새삼 눈에 들어오는 글귀 하나.  천하 무인(天下無人). 고 신영복 선생은 이 말씀을 '하늘 아래 사람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에 남이란 없다'라는 뜻으로 풀어쓰셨다. 이 나이쯤 먹고살아보니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내 일터가 시골이니 절실하게 느껴지는 말씀이다. 시골에서는 한 사람만 건너면 모두 다 어떻게든 연관이 있고 다 아는 사람들이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도시라고 해서 어찌 다르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분들도 마치 깊은 산속이나 외딴 무인도에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뿐 진정 혼자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니다. 시골에서는 당연히 끈끈하고 유기적으로 치밀하게 얽혀서 살아간다. 전날도 진료소 앞 집 A 어르신이 감기가 걸렸다고 진료를 받으러 오셔서 이웃에서 벌어지고 있는 택지 개발과 관련하여 푸념을 한참이나 내놓고 가셨다.


 최근 시골에도 도시 이주민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들은 한 동네 사는 다른 나라 사람처럼 행동한다. 마을 주민들과 별개의 존재처럼 나만의 영지 안에서 외따로 살아간다. 하지만 하늘 아래 남이란 없는 법이어서 시간이 흐르고 햇수가 늘면 조금씩 이웃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게 마련이다. 도시 사람들이 전원주택을 꿈꾸며 시골에 땅을 마련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측량을 하고 울타리를 치는 일이다. '나는 너에게 폐 끼치지 않을 예정이니 너도 절대로 내게 폐 끼치지 말고 내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뜻이렸다. 그러나 택지를 닦기 시작하면 돌을 깨거나 굴삭기로 땅을 파느라, 덤프트럭으로 흙과 돌을 실어 나르느라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어렵다. 그 과정에서 민원이 발생하고 심하면 언성을 높이고 다투기도 한다. 시골 사람들은 또 그들의 행태가 맘에 들지 않으니 걸핏하면 민원을 넣고 농기계로 길을 막기도 하며 심술을 부린다. 그렇게 남들에게 야멸차게 굴지만 어차피 이웃을 맺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것이 시골이다.


 천하 무인(天下無人)이다. 알고 보니 사돈의 팔촌의 이웃의 동생이라고 하면 남남처럼 여겨지겠지만 바로 내 집 옆으로 이사와 이웃이 된다. 그러니 새해는 부디 누구에게나 긍정으로 대하고 온유로 받아들이기 위해 애쓸 일이다. 그나저나 진료소 앞 집 A 어르신의 큰 아들이 알고 보니 내 오랜 남사친의 동네 절친이라는 놀라운 사실만 보아도 진짜로 천하 무인(天下無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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