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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May 10. 2022

살아생전 기워갚아 다행이야

92살 아내를 향한 90살 남편의 애가(哀歌)

 새벽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시간이니 아침 6시 30분이다.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전날 파견근무를 가느라 진료소 업무용 일반 전화를 휴대폰으로 착신한 상태였다. 업무 시간 외에 전화가 오면 항상 그렇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매번 속으면서도 혹시 급한 전화일까 봐 전화를 받는다. 

"나 K예요. 오늘 9시 차로 읍에 가야 해서 약 지으러 가려고 하는데요?"

"아..... 제가 8시 반까지 출근인데 급한 일이실까요?"

"아, 그래요? 그럼 이따 갈게요."

전화가 뚝, 끊겼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어르신들의 새벽은 이른 시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활동을 시작해도 되는 시간을 이르는 말이다. 새벽 5시에 전화하시는 분도 자주 계시니 나로서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시골은 '시계'는 있어도 '시간'은 없는 곳이다. 그냥 웃고 넘어가야 내 영혼이 평안하다. 


  K어르신은 벌써 진료소 현관 앞에 와서 서성거리고 계셨다. 20리터 종량제 비닐봉지에 뭔가 보따리를 잔뜩 꾸려 진입로 한쪽 땅바닥에 놓은 채 목을 길게 빼고 진료소 맞은편 공사 현장을 하염없이 구경하고 계시다가 내 차를 보고 반색을 하며 손을 흔드신다.

 '저렇게 해맑으신 분이 아닌데....' 

 K어르신은 옛날 분치 곤 키도 크고 체격도 좋으신 편이어서 팔십 대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지만 올해 딱 90살이 되었다. 9시 버스를 타고 나가셔야 한다는 어르신 때문에 내가 십 분 일찍 서둘러 출근했지만, 그걸 알 리 없으신 어르신의 첫마디는, '일찍 나오셨네, 버스 올 때 다 되어 가니 빨리 좀 약을 지어달라.'는 주문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잠시만 기다리시라'는 나의 말에 시계를 딱, 보시더니 마지못한 표정으로 안으로 따라 들어오셨다. 어르신은 내가 3년 전 이곳에 부임하여 첫 출근하는 날 이래로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 앉아 계시곤 하셨다. '어르신, 매일 어딜 그렇게 출타하세요? 하는 일이 있으신가요?'라는 나의 물음에 '읍에 놀러 간다'라고 대답하셨다.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그땐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약 포장기가 달궈지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하는데 버스 오기 전에는 맞춰질 수 있으니까 걱정 마시고 잠시 앉아 계세요."

"우리 할멈 요양원에 들어 간 거 아시죠?"

"아, 네, 어머니 입소하신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지난주에는 큰 아드님도 전화 한 번 하셨고요."

"오늘 할머니 보러 가는 날인데 약을 지어 오라더라고. 할멈 먹는 약 있죠?"

"네, 혈압약이랑 진통제를 드셨었는데, 혈압약만 드리면 될까요?"

나의 말에 펄쩍 뛰시는 어르신.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고 그 진통제 꼭 받아 오라고 했어요. 잠을 못 잘 정도로 온몸이 다 아프다는데, 온몸에 뼈만 남았는데도 아프다고 하니 원....."

"어머니는 상태가 어떠신가요? 의식은 또렷하신가요?"

"그럼~ 옛날부터 정신력은 대단했지...."

"식사는 잘하시나요?"

"그냥 한 숟갈 그저... 그 정도.... 보면 눈물만 나서... 불쌍해 죽겠어." 

"그래도 일단 요양원으로 가셔서 마음은 불편하셔도 어르신이 조금은 편안해지셔서 보는 저는 다행이다 싶어요. 어르신도 고령이시라 걱정이었는데..."

"나야 뭐, 요양사가 다 하고...."

"요양보호사가 24시간 붙어 있는 건 아니니까 서너 시간 빼고는 어르신께서 혼자 돌보신 지 거의 6개월 넘었었죠?" 

"그건 그렇지... 무엇 보다고 끼니 준비하고 먹여주는 게 어렵더라고. 내가 그런 걸 해봤나... 그저 차려놓으면 먹을 줄이나 알고, 내 손으로 뭘 해봤나, 그저 돌아다니기만 하고.... 평생."


 생각난다. 3년 전 이곳에 발령받아 오던 첫날, '우선 앉으시라'는 내게 '바쁘니까 얼른 약 좀 지어 달라'라고 하시며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으로 본인은 '평양 사범학교' 출신이라고, 해방 이후로 내내 아주 오랫동안 마을 대소사며 군청과 면사무소를 다니는 일, 앞장서서 대표로 발언하는 일들 모두를 도맡아 일을 보아 왔다고 하셨었다. 하지만 지금 어르신은 마치 내게 사과하는 사람처럼 나를 향해 한없이 낮아지고 작아진 눈빛으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대단하세요. 환자 돌보는 일이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저는 직업이어도 힘들던데." 

"그럼 어떡해. 나밖에 할 사람이 없는 걸, 애들은 바쁘고.... 그래도 살아생전에 갚아서 다행이지 뭐...."

"어머니께 잘못한 거 많으신가 보다."

내가 웃으며 가볍게 얘기했지만 어르신은 진지하고도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 하고픈대로 살아서 할멈이 고생 많이 했지. 나 진짜로 죄 많은 늙은이야."

당황한 나는 얼른 입을 다물고 업무용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수진자 정보를 불러냈다. 

"그래도 할멈 살아생전, 나 살아생전에 조금이라도 갚아서 다행이긴 한데 할멈이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서 불쌍해....."

창 밖으로 분주히 오가는 건설 현장의 풍경에 멍한 표정으로 눈길을 주고 있는 K어르신을 훔쳐보면서 어르신은 두 살 연상인 아내에게 '어떤 빚이 그리 많을까' 궁금했다. 어르신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내가 평생을 나만 알고 나만 생각하던 사람이라 할멈이 나 만나서 좋은 날이 없었지. 그저 나가 돌아다니고 집안일에는 도무지 신경을 안 써서 혼자서 종가 살림 꾸리느라 힘들었겠지.... 내가 읍에 나가서 몇 칠씩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는데.... 그럴 때는 참 많이 힘들었을 건데 생전 뭐라고 한 마디도 안 하던 사람이야... 지금은 나 혼자만 이렇게 오래 살아 있어서 그 많던 친구들도 다 먼저 죽었고, 읍엘 가도 동네를 돌아봐도 이제는 친국 없어. 나 혼자 이렇게 90 넘도록 살 줄 몰랐지.... 이제야 할멈이 저렇게 덜컥 드러누우니 그냥 서글프기만 해..."  

어르신의 독백이 마치 아무런 응답이나 결심 없이 신에게 탄식하고 간청하는 내용만이 담겨있는 '애가(哀歌)'라도 읽는 느낌이었다. 함께 놀러 다니던 친구들도 이제는 모두 늙어서 죽고 병들어 죽었다. 두 살 위인 늙은 아내는 이미 요양원에 들어가 곁에 없으니 그의 슬픈 노래를 들어줄 사람은 없는 까닭이다.


 살아생전에 기워 갚아 다행이라고 하셨던 어르신에게 너무 늦었다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실은 과거에 아내 말고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것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골 통신'에서 스캔들성 사연은 특히 아주 빠르게 전달되곤 했다. 모두가 무식해서 글자나 겨우 아는 시골에서 평균을 뛰어넘는 재력과 학력은 모두의 질투와 주시의 대상이 되고 평생에 걸친 일탈을 증언해 줄 사람들은 여전히 있으니 세월이 그렇게 흘렀어도 그 속상한 이야기들은 본인만 빼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아는 가십거리이다. 처음 발령받아 온 내게도 그렇게 훈장 어른 노릇을 하던 어르신은 아내의 요양원행으로 본인의 가까운 미래를 깨달았던 것일까.  할머니가 안 계신 오늘도 여전히 9시 버스를 타러 버스 정류장에 나와 계시는 저 어르신은 매일 어딜 가시는 걸까? 궁금하진 않지만 삼 년 전 그 눈빛은 어디 가고 아련하고 우수에 젖어 멍한 눈빛의 어르신을 보며 그래도 마음 한편은 아리다. K어르신의 지금이 바로 나와 너의 미래라는 생각 때문이다. 진료실 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별립산에 걸린 짙은 구름은 곧 비가 올 테니 채비하라는 무거운 예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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