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하는 아이들
작년에 가르친 아이들이 4월 중순을 넘어선 오늘까지 매일같이 찾아온다.
내내 천방지축 난장판으로 본인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더니 연말에 불쑥 커버려서
그래도 일 년 간의 나의 애씀과 애정, 노력이 아이들에게 가닿긴 했구나 싶어 왠지 모를 감동을 주던 아이들이
새로운 학년에 올라가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같이 나를 보러 넘어오니 내가 그래도 좋은 선생님이었구나 싶어 기분이 좋다. 안도가 된다.
3월 4일 새 학기 첫날
올해 맡은 생경한 아이들을 하교시키기 위해 인사를 하던 찰나
교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들에 나는 나도 모르게 활짝 웃어버렸다.
방학 내 안 보았다고 괜히 멋쩍은 표정으로 그러나 싱긋 웃는 얼굴로
종례를 하자마자 헐레벌떡 뛰어온 아이들이 복도 벽에 붙어 서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반도 종례가 끝나고
그럼 바로 들어와서 왁자지껄 떠들 법도 한데 6학년 됐다고 좀 큰 건지, 아니면 이제 좀 상황판단을 하는 건지
늦게 나가는 몇몇 아이들이 다 나갈 때까지 문턱을 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린다.
먼저 들어가려는 친구한테 '아! 아직 안 나갔잖아! 좀 기다리라고오!'라고 소리친다.
좀 더 와일드해진 초등학교 최고 학년들이다.
3월 말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
매일같이 와서 한 시간을 놀다 가길래 이제는 안 오겠지, 오늘은 안 오겠지 하던 게
벌써 한 달 반이 되었다.
지난 2주간은 학부모 상담주간이라 오지 말라고 해도 끝끝내 와서 얼굴을 잠깐이라도 비추고 가는,
짧은 인사라도 하고 가는 아이들이 웃기고 귀엽고 예쁘다.
물론 새 학기가 되면서 나도 새 학급, 새 아이들, 새 동료교사와 손발을 맞추고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기에
매일이 고되고 힘들다. 아이들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말을 하고 매일같이 '수업 시간에 돌아다니지 않아요, 쓰레기는 쉬는 시간에 버려요, 수업 중에 화장실은 허락을 맡고 다녀와요'와 같은 기본적이면서 시답잖은 말들을 아주 중요하고 철저하게 지도하고 반복한다.
이런 것들을 알려줘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고? 싶겠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매일같이 목소리가 쉬어가며 말하고 알려준다. 절대 한 번 아니 백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일 년 동안 적어도 만 번은 하는 것 같다. 내가 맡고 있는 아이들이 5학년인데 그렇다면 아마 이들은 지금까지 4만 번은 들었을 테고 그런데 여전히 수업 중에 혼자 나갔다 오고 선생님이 설명하고 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제 볼 일을 본다. 사물함에 간다든지,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든지, 친구에게 장난을 치거나 시시콜콜한 사적인 걸 묻는다든지 등등.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하는 것 같이 생각되는 많은 것들은 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모를, 자리잡지 않았을 습관이고 질서이다. 이런 작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이 일 년의 학급질서와 안정적인 운영을 결정하는 근간으로 작용하기에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지치고 피곤해지면서도 놓지 못하고 계속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학교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계속 있어왔고 당연히 가는 곳이기에 사람들은 점점 그 역할과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망각하지만 학교는 배움이 있는 곳이다. 단순히 학습, 성적을 위한 공부의 배움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방법, 사회와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 존중과 배려로 다양한 개체와 소통하는 이유, 왜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배움이 있는 곳이다. 학교가 점점 돌봄의 공간으로 전락하고 가정에서 이뤄져야 하는 많은 가정교육들이 일임되고 그러면서도 학교는 사회성을 기르는 주축이 아닌 공부하는 곳이란 인식에 지배되는, 그러나 사교육에 밀려 아이들은 학원 숙제를 수업시간에도 하면서 어쩌다 내주는 학교숙제는 당당히 안해오고 1분이라도 늦게 끝나면 학원차 못탄다고 울상이 되어 씩씩거리며 나가는 이 곳이 나는 점점 엉망이라고 느껴진다. 모든 것에 마음을 내려놓으면, 더 해주려고 하지 말고 잘해주려고도 하지 말고 나도 최소한의 것만 하면, 정말 '내 자식도 아닌데..'의 마음을 먹으면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게 맞는 길일까.
5학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제대로 생활습관이 자리잡지 않고 저학년처럼 행동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그만 피곤해지고 만다. 꽤나 자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이걸 계속해야 하나 하는 끝나지 않는 고민과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 지치고 힘이 들고 소진되어 아이들이 가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실은 뭘 많이 하고 싶은데 힘이 빠져 멍해진다. 이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
교육의 가치와 보람은 분명하지만 끊임없이 나를 갈아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순환의 고리에 새 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오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나를 찾아오는 아이들이 고마우면서도 내가 너무 힘들고 진이 빠진 날이면 오늘은 안 왔으면 싶었다. 아이들에게 내어줄 나의 힘과 밝음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오면 아이들이 기특하고 예쁘고 내가 힘을 얻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 달 반이 흘렀다.
그러다 어제, 혹시나 집에 곧장 가고 싶은데 매일 오겠다는 약속을 지킨다고 부담을 느끼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이제 매일 안 와도 돼,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집에 가도 돼'라는 말을 전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왔고 무려 아이들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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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무려 두 명이나 연애를 한다고!
아니 이 선생님은 짝사랑에 실패하여 매일같이 눈물짓고, 괜찮아졌다가도 속이 마구 상해지며 땅으로 꺼져가는데 이제 인생 10년 하고 조금 더 산 아그들이 연애를 한다고오..?
진짜 너무한다.. 너네..
근데 누구랑 사귀어?? 아니 우리 예쁜이들이 누구랑 연애를 한다는 말이야!!
지난주에 왔을 때 뭔가 말하려다가 자기들끼리 비밀이라면서 속닥이는 걸 보고 짐작은 했건만
그래도 두 명이나, 심지어 예상 밖의 인물들이(모두가 예상 밖의 인물이긴 하지만^ㅡ^)
연애를 한다니 나는 너무 놀라고 말았다.
울 반 귀여운 개구리와 울 반 가장 멋쟁이가 각각 남자친구와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개구리는 작년 5학년 최고 말썽쟁이 중 한 명과 커플이 되었고
멋쟁이는 작년에 복도에서 맨날 무리 지어 다니던 여자애 중 한 명과 커플이 되었다.
작년에 서로 모두 다른 반이었고 친구들 간의 접점도 없었던 터라 아니 도대체 어떻게 커플이 되었냐고 물으니
개구리는 고백을 받았다고 했다. 언제부터 좋았냐고, 원래 좋아했냐고 물으니
'고백을 받고 좋아졌어요.'라고 대답한다.
아이고야...
왜 그랬어.. 그 아이는 아니야..
나는 놀랍고 웃기고 그랬지만 그래도 축하는 못해주겠다고 진담 꽉꽉 채워 말해줬다.
좀 괜찮은 아이를 만났으면 싶은 마음에 속이 상해진 건, 어쩔 수 없이 내가 이 아이들을 1년동안 희노애락을 다 겪으며 함께 했기 때문이다.
멋쟁이는 내가 봐도 애가 참 진중하고 괜찮아서 작년에 마음을 많이 썼던 남학생이었다.
장난치기 좋아하고 공부에 관심도 별로 없었는데 시키면 잘할 것 같고, 생각도 은근 똑바르고, 잘만 잡아주면 시류에 휩쓸리지도 않을 것 같아 신경을 많이 쓰고 진심으로 다가가 관계를 쌓았었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어느 날부터 나를 따르기 시작해 지금은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유일한 학생이 되었다.
그랬는데,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알고 그걸 표현하고 사귀기까지 한다니 왠지 이상하고 놀랍고 기분이 묘했다. 작년에는 서로 몰랐는데 올해 같은 반이냐 물으니 그것도 아니라 하고 도대체 어떻게 좋아진 건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원래 좋아했냐고 물으니 부끄러워하며 대답을 안 하다
진짜 좋아해? 진짜 좋아서 사귀는 거야?라고 물으니
'지금은 좋아하죠'라고 담백하게 대답하는 이 친구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멋쟁이라서 안도한다. 이 친구라서 응원한다. 축하한다.
장난으로 할 아이는 아니란 걸 알아서, 꽤나 진심일 걸 알아서, 말하지 않아도 표정과 눈빛으로도 가볍지 않음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아이의 사랑을 오래도록 지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