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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Aug 01. 2024

서툴다는 변명의 폭력성

그건 핑계에 불과해 서툼으로 도망치지는 건 비겁해


산책을 하지 않겠느냐는 답이 그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닌 것쯤은 아는 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는 표현도 아니다.

그건 연락을 하며 느껴온 상대의 마음과 감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일 뿐이다.


동갑이 아니었다면 연락을 하면서 받은 호감의 표현에 덜 헷갈리고 산책하자는 말이 정말 이성적인 감정임을 분명히 할 수 있었을까. 친구관계의 성립 자체가 불가한 관계니까. 나도 긴가민가하지 않고, 헷갈려하지 않고, 상대의 마음의 방향을 확실히 알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내 마음도 알고 싶어 산책의 자리에 나가는 일은 없었을까.


      —————————————————————


연락을 하며 나눈 것들은 그냥 각자의 출근을 응원하고 맛있게 밥을 먹으라는 일상적이면서 어쩌면 상투적인 것들이었고 갑자기 그가 이상형 이야기로 대화의 활로를 바꿀 때 그러면서 내 이상형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때 그대로 차용하는 순간 얼마간 눈치는 챘었다. 하지만 우리는 겨우 알게 된 지 3-4일이고, 서로 소개팅을 해주자며 연락을 시작하게 되었고, 동갑이니 이상형 이야기가 시작되는 게 그리 이상하고 의심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말한 이상형이 세부적이고 구구절절한 것도 아니었고 열몇 글자 내외의 간단한 문장 속 누구나 이상형을 말할 때 포함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표현과 상관없이 그 친구가 앞서 꺼낸 진짜 자기 모습과 외부에서 바라보는 자기 모습 사이의 간극으로 고민하는 부분과 연결 지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했다. 그래서 눈치를 채면서도 아닐 수 있는 조건들이 훨씬 많으니까 나는 아직은 조금 부담스러워서 눈치채지 못한 척, 애써 모르는 척 잘 넘어가려 했다.


그렇게 이어지는 연락 속 하루의 끝에 잘 자라는 안부인사로 끝맺어지는 연락이 있었고 아침에 일어나 확인한 그 문자로 나는 이 연락이 끝을 맺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먼저 보낸 잘 자라는 메시지 앞의 내용들에 대한 답은 하나도 없이 본인도 자려고 누웠다며 잘 자라는 대답으로 마무리되는, 누구와 연락을 해도 그게 대화가 이제 끝이 났음을 보이는 마무리 멘트임을 알 수 있는 그런 마지막 문자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끝난 줄 알았다. 아니 그건 끝난 대화가 맞았다.


그런데 이 친구의 문자 스타일로 봐서는 이 대화가 끝난 게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매번 잘 자라는 문자로 대화를 끝을 내어도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연락으로 대화를 이어가던 사람이었으니까 나에게도 그런 기대를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의 스타일에 맞춰 애써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것 또한 순전히 내 추측일 뿐이었다. 어차피 대화는 마무리가 되었으니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상대의 몫이었다.


그러다 나는 이 관계가 어떤 건지 궁금했고, 상대의 이성적 어필이 맞다면 그에 대한 내 마음은 어떨지 알아보고 싶었다. 나는 이 친구에 대해 이성적일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상반기 중 가장 바쁜 시기에 짬을 내어 그리 오래지 않아 문자를 보냈다. 오전에 정신없이 바빠서 답이 늦었다고, 출근은 잘했는지 물었다.


그리고 내가 받은 답은 이것이었다.


"앞으로 아는 척 안 하려고 했는데"


이뿐이었다.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고, 조금 많이 무서웠고,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었고, 의도와 근거와 연유를 헤아릴 수 없는 폭력적인 말 앞에서 이미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렇다. 나는 이미 없어졌고 이 관계는 이때 끝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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