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라 하면 괜찮은, 그래도 다시 겪고 싶지는 않는
나에게 호감을 표현해 준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만하자고 했다.
그 사람은 너무 급했다.
그게 날 너무 힘들게 했다. 마음이 부치게 했고 지치게 했다.
급하기만 했으면 달랐을까.
나한테 자기감정을 그렇게 폭탄처럼 던지고 자존심은 세서 도망가버리고 숨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아니.
내 대답은 생황이 어떻게 흘러갔어도 아니었을 거다. 확신할 수 있다.
단지 그 사람의 그런 태도가 끝내는 시점을, 내 마음을 알아차릴 때를 앞당겼을 뿐,
내 대답은 똑같았을 것이다.
나는 네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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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는 뭔가 좀 웃겼다. 곁을 잘 내어주지 않고 벽돌처럼 엄청 강하고 세 보이는데 또 막상 보면 낯가림이 심할 뿐 생각보다 진입장벽이 낮아 보였다.
말을 좀 툭툭하고 사용하는 표현들이 가끔 남달라서 그게 다른 사람들을 웃게 했다.
사람 자체가 유머러스하고 재밌지는 않은데 그냥 하는 말들이 예상치 못하고, 생각지 못했던 단어나 관점이라 그게 특이하게 웃긴 캐릭터였다.
나는 이 친구와 동갑이었고, 그래서 예전부터 이 친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게 다였다.
근래 같이 자리를 하게 되는 순간이 몇 번 있었고 동갑이다 보니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이상하게 웃긴 이 친구와 동갑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서로 소개팅을 해주자며 번호를 교환했고 밥 한 번 먹자 하고 헤어졌다.
막상 번호를 교환했지만 소개팅에 대한 생각은 차치하고 이 친구에게 연락을 하는 게 그렇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이 친구랑 밥을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따로 연락을 해서까지 밥을 먹고 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고 또 우연히 만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이 친구는 나에게 왜 메신저앱에 프로필이 안 뜨는지 물었고 나는 자동등록 설정을 해두지 않았다고 답했다.
문자로 하면 되지 프로필 안 뜬다고 궁금해하고 있었냐고 물었고 그 친구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 나름 당황해했을 듯싶다.
그리고 일주일이 다시 흘렀고 번호를 교환할 당시 함께 자리했던 친한 동생과 밥을 먹으면서 이 친구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번호 교환하고 아직 연락 안 했다고 하니 나중에 친해지면 서운해할 스타일이라고 빨리 연락을 하라고 했다.
나도 번호도 받았는데 한 번은 봐야 하고 동갑이니까 편한 마음으로 연락해 볼 수 있어 그 자리에서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12일 간 연락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또 12일 간 아주 많은 일들이 아니 모든 일이 있었다. 그리고 끝이 있다.
고백도, 호감표현도 없이 자기가 낸 용기, 자기 마음의 크기와 속도만 생각하고 나에게 서운함을 내지르고 도망가버린 순간이 있었고 그 마음을 풀어주려 애쓴 내가 있었고 그래서 천천히 알아가 보자 했지만 남자친구처럼 구는 그가 있었고 이미 그때 이성적인 느낌은 끝났던, 또다시 감정적 반응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혼자 소진되어 간 내가 있었다. 그 모든 일이 서로가 알게 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그 친구는 그 사실을 알까. 아마 이 사실도, 끝을 낸 이후로 나는 어떤 마음일지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잘 끝났고 정말 친구로 남을 수 있고 우리 각자가 괜찮은 줄 아니까. 그렇게 상대의 감정이나 상황은 헤아릴 줄 모르는 해맑은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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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연락을 할 때 밥약속을 잡고 마무리했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뭘 이런 걸 궁금해하나 싶게 엉뚱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날 우연히 내가 우산을 씌워주게 되었고 그게 고마웠다는 문자로 연락이 끊기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렇게 연락을 계속할 스타일이 아닌 것 같은데 사소한 이야기를 계속 꺼내며 연락을 이어가는 이 친구가 좀 이상하고 신기했다. 그래서 이 친구를 십 년 동안 봐 온 친한 동생에게 물어보니 내가 아직 예의를 차려하 하는 사람이라 노력하고 있는 거라고, 연락을 계속하는 건 아마 나와의 연락이 재미있어서일 거라고, 절대 내키지 않는 걸 억지로 하는 스타일은 아닐 거라고 했다.
이 친구랑 4일 동안 연락을 안 끊고 하는 게 좀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밥 먹기 전에 친해지는 과정이다 생각하면 또 괜찮을 것 같아 밥 먹을 때 어색하지 않기 위해 연락을 이어갔다. 그래도 굳이 이렇게 연락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중간에 마무리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화젯거리로 다시 연락을 시작해 오는 이 친구가 있었다.
그러면서 점점 느껴졌다. 엄청 투박하고 너무 티가 나 약간 이상하게 열받는, 나를 향한 마음이 느껴지는 문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이 늘 그렇듯 긴가민가하게 되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어 만나봐야 아는, 연락을 더 해봐야 아는, 돌다리를 두드려보는 심정으로 더 가봐야 하는 것들이었다.
이 친구랑 연락을 하는 게 좀 웃기고 재미도 있었고, 나는 정말 친구로 편하게 다가갔지만 은연중에 내비치는 이 친구의 마음이 그렇게 불편하거나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로 헷갈렸다.
이게 무슨 말이지? 이거 그거 맞아? 싶게 생각하게 되는, 오히려 너무 투박하고 서툴고 직접적이라 오히려 아닐 거라 생각하게 되는 표현들이었다.
내 이상형을 그대로 따다 붙인 자기 설명 문장이나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자기의 모습에 대한 고민을 은근히 내비치며 정말 자신이 그런지 나보고 알아보라고 하는 멘트라던가. 윽하게 되는데 또 이게 뭔가 싶은, 알게 된 지 4일 만에,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데 하는 말은 저런 것들이라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은, 긴 것 같으면서도 에이 설마 하며 손사래 치게 되는 지점들이 계속 있었다.
나는 늘 그렇듯 모든 일에 진심이고, 같은 집단에서 알게 된 남자 지인이든, 여자 지인이든 모두에게 늘 솔직하고 진심인 마음으로 대화하고 삶을 공유하기에, 그래서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친해진 사람들이 많기에 여느 때와 똑같이 그 친구의 고민에, 어쩌면 플러팅인 것 같은 그 멘트를 잘 넘어가기 위해 내가 생각하는 그 친구의 모습에 대해 진솔하게 남겨 주었다. 그리고 그 문자에 자기를 알아봐 줘서 고맙다는, 산책을 하자는 답장이 도착했다.
그때 산책을 가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