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시절, 나는 왼종일 선아네 집에서 뒹굴었다. 선아는 우리 앞집에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앞집 천 씨 아저씨네 문간방이 선아네 네 식구가 사는 집이었다. 선아에게는 연년생 언니와 세 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아빠는 없었고, 엄마는 보험을 팔았다. 아침이면 화려한 스카프에 꽃핑크 루즈를 바른 선아네 엄마가 학교 가는 삼 남매와 함께 대문을 나섰다. 그녀는 키가 작았지만, 걸음이 빨랐고, 목소리가 컸다. 내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면 ‘와하하하하~ 학교 가니?’ 하고 대답했다. 어떤 말이든 와하하하하, 하는 웃음을 앞세우고 나서야 본론이 등장했다. 왜 웃는지 이유를 묻고 싶어도, 이미 그녀는 발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삼 남매가 세입자로 있는 탓에 앞집 대문은 노상 열렸다. 우리 집 대문에서 다섯 발자국만 걸으면 선아네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건너가듯, 아무 때나 선아네 방문을 쓱 열고 들어갔다. 선아도 나의 드나듦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오면 엎드려 만화를 보고 있다가몸을 조금 옆으로 움직여 내가 앉을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남동생은 강아지마냥 종일 밖에서 뒹굴었기에, 낮 동안 그 방은 선아와 언니와 나, 셋의 차지였다. 현아 언니는 만화를 아주 잘 그렸다. 언니가 엎드려 그림을 그리면, 선아와 나는 양쪽에 바짝 붙어 구경을 했다. 가끔은 서로 머리통을 야금야금 들이밀다가, 형광등을 가린다고 언니가 갑자기 신경질을 부려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언니는 드레스를 입은 소녀를 스케치북에 그려 화첩으로 묶었고, 노트에는 스토리가 있는 순정만화를 책처럼 엮어냈다. 작은 책꽂이에는 언니가 직접 그린 만화책이 몇 권 꽂혀 있어서, 심심할 때마다 나는 수시로 그걸 꺼내어 다시 읽곤 했다.
언니의 만화는 일관된 세계관을 고수했다. 여주인공은 대체로 가난한 고아다. 성격은 씩씩하고, 자기가 예쁘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다. 무엇이든 매사 열심히 하지만, 동시에 못 말리게 덜렁거려서 중요한 순간마다 위기에 봉착한다. 그럴 때마다 다리가 겨드랑이에서부터 시작하는 롱다리의 남자 주인공이 나타나 ‘훗~귀여운데?' 한 마디 던지고는 그녀를 난관에서 사뿐히 건져 올린다. 여주는 ‘고맙지만 남의 도움은 정중히 사양한다’며, 방귀 뀐 놈이 오히려 성내는 표정으로 토라지는데, 어이없는 것은 남자들이 그 배은망덕한 모습에 매번 반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입 옆에 왕점을 찍어 누가 보아도 적대적 조연임을 짐작케 하는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나 나만큼이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주인공의 뺨을 갈긴다. 뺨을 맞은 주인공은 거기서 한마디를 더하여 두 번째 매를 벌곤 했다.
- 니가 아무리 내 뺨을 갈겨도 나는 반드시 OO을 이루고야 말 거야!
주인공들에게는 늘 간절한 소원이 있었는데, 뺨따귀를 맞으면 자동으로 그 내밀한 바람이 폭로되는 시스템이었다.
얼굴을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종아리나 등짝만 맞아봤지 뺨을 맞아본 적은 없어서 나는 늘 궁금했다. 호기심에 내 뺨을 한 번 쫙! 소리 나게 때렸다가 너무 아파 기절할 뻔했다. 뺨을 맞는 것은 영혼을 담고 있는 머리통에 대한 직접적 가격이어서, 모종의 굴욕감마저 솟구쳤다. 과연 아무한테라도 ‘두고 보라’며 으르렁거리고 싶어졌다.
악녀는 보통 정략 관계로 맺어진 남주의 피앙세인데, 별안간 가문이 멸망하면서 깔끔하게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이 즈음 되면 언니의 피로도가 쌓이는 바람에 모든 사건이 급속도로 정리된다.) 빌런이 없는 세상에는 다시 행복이 찾아오고, 마침내 주인공은 사랑과 야망을 두 손에 움켜쥐고 작품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선아와 나는 언니가 그린 만화책을 보면서 드레스에 프릴을 좀 더 넣어 달라거나, 남자의 바지를 무릎 위쪽이 봉긋한 승마바지로 그려 달라거나, 여주의 웨이브를 이라이자 머리로 바꿔달라거나 하는 요구를 댓글 대신 구두로 전달했다. 언니는 폭신폭신한 점보지우개를 몇 번 쓱싹쓱싹 휘둘러 그림을 지우고, 빗발치는 독자의 니즈를 실시간으로 반영했다. 인물들이 우여곡절을 겪다가 마침내 행복에 도달하는 것을 보면 뻔히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번번이 기분이 좋아졌다.
한 인생의 간난신고를 통해 권선징악이라는 고매한 교훈까지 달걀처럼 쏙 낳아주면서, 작품이 해피한 앤드에 도달하는 데 소요되는 지면은 대략 10페이지.
우선 노트를 4등분 해 박스를 세팅하고, 박스 한가운데 인물을 배치한다. 그 다음은 인물의 양 측면에 광활한 말풍선을 달아놓고 그 안에 깨알 같은 글씨를 채워 넣는 것이다. 그것만 꼼꼼히 읽어도 웬만한 스토리 파악은 가능했다. 간혹 인물의 대사로 처리하기에는 정보의 접근성 차원에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내용이 있는데, 그럴 때는 종이 상하 여백에 전지적 작가의 내레이션을 덧붙였다. 이 효율적인 화면 배치 덕분에, 이야기는 종이를 크게 잡아먹지 않고도 독자를 충분히 납득시키면서 빛의 속도로 전개되었다.
언니의 오동통한 손이 종이 위를 넘나들면 언니와 생김새가 정반대인 미녀가 뚝딱 탄생했다. 그 신묘한 솜씨가 부러워, 언니의 그림을 따라한 적도 있었다. 역삼각형으로 얼굴 윤곽을 그리고, 얼굴의 반절을 눈으로 채우면 절반은 성공이었다. 커다란 눈 속에 크기가 다른 동그라미 서너 개를 더 그려 넣고, 나머지 뒷배경을 까맣게 칠하면, 빛을 반사하는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완성되었다. 손눈썹은 겉눈썹을 치고 올라갈 정도로 길게 그리되, 활처럼 유려한 곡선을 만드는 것이 포인트였다. 눈을 그리는 데 소요된 시간과 정성에 비하면, 코나 입은 어이없을 정도로 무성의하게 처리되었다. 코는 < 모양의 꺾은선 하나면 충분했고, 입도 B를 눕혀놓고 그 아래 C를 붙이면 간단하게 끝났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장신구와 웨이브와 빛 반사가 미궁처럼 얽혀있는 헤어스타일에 이르면, 연필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지 시작점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결국 종이 위에 픽 쓰러지고 말았다. 그럴 때면 언니는 내가 그려놓은 허접한 얼굴에 리본이 달린 공주 머리와 목둘레에 레이스가 감긴 블라우스를 그려서 돌려주었다. 언니의 손끝에서는 뭐든 척척 생겨나는 것이 신기했다.
선아네 방에서 가장 희한했던 것은 상장으로 뒤덮힌 벽이었다. 현아 언니는 학교에서 주는 상장이란 상장은 죄다 쓸어왔는데, 선아의 엄마는 그것을 차례대로 벽에 붙였다. 그방에서는 시선의 끄트머리 어디에나 언니의 상장이 보였다. 나는 벽에 다리를 올리고 누워 언니가 받아온 상장 문구를 읽곤 했다. 글짓기, 독후감, 사생대회, 과학경시대회, 수학경시대회, 방학과제물상, 착한 어린이상, 줄넘기대회... 어? 언니가 줄넘기로 상도 받았어? 놀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만 유일하게 주인이 달랐다. 그건 선아 거였다.
선아는 이런 언니를 ‘돼지야’ 또는 돼지를 빼고 그냥 ‘야’라고 불렀다. 언니는 이 두 가지 호칭을 모두 싫어해서, 선아가 언니를 부를 때마다 눈을 하얗게 흘겼다. 언니가 화를 낼수록 선아는 더 신이 나서 놀려댔기에, 결국 언니는 선아가 뭐라고 지껄이든 반응하지 않았다.
우리가 공기알이나 트럼프 카드를 늘어놓고 낄낄거리는 동안에도 언니는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거나 만화를 그렸다. 그러다가 끼니때가 되면 부엌에 내려가 라면을 끓였다. 언니가 냄비에 물을 올리고, 선아가 골목으로 나가 ‘영훈아~ 밥 먹어~’라고 (인근 1km 반경에서 영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뒤를 돌아볼 정도로 크게) 외치면, 나는 슬며시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 먹고 설거지까지 끝냈겠다 싶을 때 쯤 용수철처럼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갔다.
가끔 언니는 라면 대신 식빵과 설탕과 마가린을 꺼내 오기도 했다. 빨간 꽃이 그려진 양은 밥상에 오뚜기 마가린이 놓이면, 집에 가려고 일어섰던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평소 같으면 잽싸게 빠져줄 타이밍인데, 고소한 밀가루 냄새와 뇌쇄적 마가린 향기가 체면 세포를 마비시킨 것이다. 그럴 때면 언니가, ‘야, 어디 가. 빵 먹어야지.’ 하면서 영훈이를 부르는 말투로 나를 주저앉혔다. 식빵에 딱딱한 마가린을 밥숟가락으로 펴 바르고, 접시에 덜어놓은 백설탕을 그 위에 뿌리고, 탁! 빵을 반으로 접어 한 입 베어 물면, 빵이 목구멍을 통과하기 전부터 황홀경이 밀려왔다.
배가 부르면 집 앞에 나와 고무줄놀이를 했다. 선아와 나 둘 뿐이라 고무줄의 한쪽은 전봇대에 묶었다. ‘월남마차타고가는캔디아가씨’ 혹은 ‘월계화계수수목단금단토단일’ 하는 요일송에 맞추어 둘이 번갈아 고무줄을 뛰다 보면 금세 또 배가 고팠다. 언니도 같이 놀면 공공노역에 바쁜 전봇대까지 굳이 동원되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언니는 이렇게 몸을 쓰며 노는 것은 질색을 했다. 오히려 엄숙한 어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우리를 타이르기까지 했다. 뛰지 마라. 배 꺼진다.
선아는 잘 놀다가도 수가 틀리면 마구 소리를 지르며 언니한테 대들었다. 선아가 그럴 때마다 언니는 미친년 지랄하네, 욕 한번 쏘아주고는 더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선아는 지랄도 잘하고, 고무줄도 잘하고, 싸움도 잘했다. 쌈닭 같았던 선아가, 아예 닭을 넘어 육식 익룡 프테라노돈처럼 변신할 때가 있는데, 그날은 영훈이 어디서 쥐어터지고 들어오는 날이다. 선아는 언니한테 그렇게 바락바락 대들면서도 남동생만은 끔찍이 아꼈다. 영훈이 누런 코를 훌쩍이며 ‘누나~’ 하고 나타나면, 선아는 고전적인 대사 - 누가 내 동생 건드렸어 - 를 던지며 출격했다. 자기보다 힘이 세거나, 덩치가 크거나, 나이가 많거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단 개새끼야! 고함부터 지르고는 머리로 들이받고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둘렀다. 수의적 관절을 지닌 모든 신체기관이 일제히 공격무기로 돌변하는 순간이다.
한 번은 선아의 복수혈전이 도미노 폭탄처럼 번진 적도 있었다. 시작은 역시 사소했다. 동네 꼬마가 더 꼬꼬마인 영훈을 때렸고, 맞은 영훈이 선아에게 일러바쳤고, 평소처럼 공격력 만렙의 선아가 나타나 동생을 때린 꼬마를 두들겨 주었는데, 하필이면 그 꼬맹이 역시 일러바칠 형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선아처럼 달려온 꼬맹이의 형이 선아와 맞붙었지만, 선아보다 한 뼘은 더 컸던 그 애는 상승하는 선아의 정수리에 코가 받혀 쌍코피를 뿜고 나가떨어지기에 이른다. 둘은 듀엣으로 징징거리며 끝판왕을 호출했다. 제 엄마를 끌고 나타난 것이다. 아무리 천하의 선아라도 어른한테까지 박치기를 날리지는 못했다. 아들 둘을 피떡으로 만든 사람이 고작해야 비쩍 마른 여자애라는 것에 화딱지가 난 엄마는 선아를 앞에 두고 자기 아들을 야단치기 시작했다. 두 아들의 잘못은, 꼬맹이한테 먼저 주먹을 날린 것도, 덩치 큰 놈이 작은 여자애한테 덤빈 것도, 덤볐다가 되려 맞은 것도 아니었다. 손은 아들의 머리를 쥐어 박으면서도 눈은 선아를 노려보던 그 애들의 엄마는 송곳 같은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저런 애랑 놀지 말라고 했잖아.
싸움 구경에 신이 났던 동네 아이들은 이 장렬했던 전투의 결말이 다시는 저것들과 놀지 않겠다는 형제의 다짐으로 마무리되자 실망한 듯 곧 흩어졌다. 그제서야 선아는훌쩍 거렸다.구석에 숨어 있던 나도 선아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울지 마, 울지 마. 내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주자 선아는 고분고분 얼굴을 내밀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막다른 골목에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요일은 선아 엄마가 일을 나가지 않아, 나도 선아네 집에 가지 않았다. 나른한 늦잠에 취해 이불속에서 뒹굴거리던 나는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와 밖으로 튀어 나갔다. 동네 사람들도 죄다 골목에 나와 있었다.
덩치 큰 여자들이 선아네 살림살이를 골목으로 내던지는 중이었다. 한 명은 욕 담당, 둘은 물건 담당. 옥색 투피스를 입은 중년의 여인이 뭐라고뭐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감정은 격앙되고, 말은 빠르고, 어휘의 절반은 욕이 차지하고, 문장은 사투리 종결어미로 마무리되어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눈치로 겨우 조합한 바에 따르면 선아 엄마의 죄는 ‘한 번만 더 알짱대면 낯짝 들고 살지 못하게 해주겠다’는 그녀의 경고를 무시한 것이었다. 목소리 크기로는 누구한테 뒤처질 것 같지 않았던 선아의 엄마는 어쩐 일인지 집안에 박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옥색 투피스가 욕을 하는 동안 나머지 둘은 행동대장처럼 부지런히 집안에서 살림살이를 들어냈다. 파괴의 굉음과 파괴의 언어가 산화반응을 일으키며 분노의 폭발이 골목을 집어삼켰다. 만화를 그리던 앉은뱅이책상, 책상 위의 책꽂이, 그 옆의 비키니 옷장, 옷장 속의 이불, 이불을 발로 밀며 다리를 펼치던 동그란 양은 밥상, 라면을 끓어 먹던 곤로, 곤로 옆에 포개 놓았던 그릇, 접시. 냄비... 커다란 주걱으로 선아네 방을 안쪽에서부터 알뜰하게 긁어낸 것처럼 살림들이 차례로 골목에 쌓여갔다. 이 모든 소요가 일어나는 동안에도 선아네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마침내 한 여자가 열 손가락 가득 종이 다발을 움켜쥐고 집 밖으로 나타났다. 그건 벽에 붙여 놓은 언니의 상장들이었다. 선아의 엄마가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암팡지게 상장을 찢어발기고 있던 여자는 신발도 없이 뒤따라온 엄마에게 뒷머리를 잡혔다. 엄마의 선공을 신호로 본격적인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삿대질만 하던 옥색 원피스가 대번에 엄마의 머리끄뎅이를 낚아챘고, 정신을 수습한 나머지가 협공으로 가세했다. 뺨을 때리고 발길질을 하면서 그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 하이고야. 첩년의 새끼가 공부 잘하면 무슨 소용이라고, 주제를 알아야지...
기물파손 현장에는 차마 끼어들지 못하던 이웃들도 사태가 폭력 상황으로 치닫자, 비로소 싸움을 뜯어말렸다. 선아 엄마는 골목에 대자로 누워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세 여인은 자빠진 그녀에게 또 다시 똑같은 경고 - 한 번만 더 알짱대면 낯짝 들고 살지 못하게 해 주겠다-를 날리고, 침까지 퉤! 뱉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주인 아줌마가 널브러진 선아 엄마를 부축해 집으로 들어가자, 다른 이웃들은 깨지지 않은 세간을 골라 대문 안쪽에 들여놓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목격한 원색적 폭력에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구경꾼도 흩어지고, 선아네 방에서 세어 나오던 흐느낌도 서서히 잦아들자, 마침내 골목에는 처음보다 더한 정적만 가라앉았다.
나는 혼자 골목에 남아 깨진 접시 사이에서 그것들을 그러모았다. 언니의 상장. 화첩, 만화책... 모두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다.
바람이 불어 골목 가장자리로 종이가 흩날렸다. 나는 한참을 뛰어다니며 그것들을 한 데 모았다. 찢어진 조각을 퍼즐처럼 맞추고, 집에서 투명테이프를 가져와 그 위에 붙였다. 찢어진 노트 안에서 여주인공이 두 주먹을 쥐고 포효했다.
- 니가 아무리 내 뺨을 갈겨도 난 반드시 왕립 발레단의 발레리나가 될 테야. 니가 아무리 내 뺨을 갈겨도.
다음 장으로 넘기니 주인공 아멜리아는 마침내 왕립 발레단원이 되어 찬란한 무대에 우뚝 섰다. 언니의 작품에 새드엔딩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