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떡볶이는 학교 앞 문방구였다. 80년대 국민학생들에게 학교 앞 문방구는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복합 쇼핑몰이었다. 좁은 점포에는 백 종이 넘는 장난감과 천 종이 넘는 불량식품들이 송곳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우글우글 진열되었다. ‘새나라 문방구’는 교문 앞 네 곳의 문방구 중 가장 평수가 넓었는데, 주인아줌마는 그 메리트를 활용하여 한 구석에서 떡볶이와 핫도그 장사를 시작했다. 아줌마가 네모난 철제 말통에서 쇼트닝을 긁어 튀김팬에 넣으면, 돼지비계처럼 하얗던 기름이 순식간에 투명하게 변하면서 고소한 냄새가 교문 앞까지 진동했다. 그 냄새에 홀린 꼬맹이들은 하굣길마다 문방구 앞에 줄을 섰다.
핫도그 옆에서는 떡볶이가 끓었다. 오뎅이나 파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밀가루 떡볶이였다. 50원을 내면 아줌마가 연두색 플라스틱 접시에 떡 열 개를 담아 주었다. 접시를 받으면 내 눈은 번개처럼 떡볶이 개수부터 확인했다. 대충 담는 것 같았는데, 세어보면 여지없이 딱 열 개였다. 떡을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동일한 속도로 접시 위의 떡이 사라지는 풍경은 언제나 마음을 황폐하게 했다. 떡이 한두 개 남으면 마무리 작업에 돌입했다. 떡볶이 긴 몸체를 활용하여 마지막 국물까지 남김없이 훑어 마시는 것이다.
엄마는 아침 마다 100원을 주었다.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하루는 살아도 살아도 쉽게 저물지 않았다. 온종일 먹고 싶은 것은 백 가지도 넘었지만 가진 돈은 백 원뿐이어서, 나는 매일 갈등에 시달렸다. 머릿속으로 먹고 싶은 것들을 죽 열거한 뒤, 토너먼트로 이상형 배틀을 벌이곤 했다. 떡볶이는 매번 상위권에 랭크되었기에, 일주일에 몇 번씩 나는 문방구 앞을 기웃거렸다.
떡볶이를 먹을 때마다 후방을 경계하는 버릇은 경신이 때문에 생겨났다. 경신이는 은영이의 남동생이다. 은영이는 옆골목의 친구였는데, 엄마가 일하러 가서 은영이는 종일 남동생을 달고 다녔다. 친구들과 놀면서도 은영이는 1분에 한 번씩 경신이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잠깐만 방심해도 경신이는 사라졌고, 그때마다 은영이는 놀던 것을 다 팽개치고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허둥댔다. 누나의 목소리가 들리면 경신이는 먹던 것을 잽싸게 뒤로 감췄다.
경신이가입에 물고 있는 것은 주로 땅바닥에 떨어진 쓰레기였다. 부라보콘을 돌려 깐 종이 껍데기, 다 먹고 버린 쮸쮸바 비닐, 마시고 던진 오란씨병... 이런 것들이 경신이의 즐겨찾기였다. 쓰레기는 휴지통에 버려야 한다는 발상이 아직 국민들에게 발아하기 전이었다. 사람들은 찰나의 주저함도 없이 온갖 오물을 거리에 버렸다. 어차피 길에는 휴지통 자체가 별로 없었다. 골목에는 온갖 생활쓰레기가 넘쳐났다.
경신이가 노리는 것이 그것이었다. 경신이는 죙일 구멍가게 앞을 서성대다가, 먹을 것을 사들고 나오는 애들이 보이면 그 뒤를 무작정 따라갔다. 끈질기게 뒤를 미행하다가 껍질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걸 집어 입에 넣는 것이다. 호빵 바닥에서 떼어낸 종이, 남이 빨던 하드 스틱 같은 것은 오래도록 입에 물고 잔향을 음미했다. 소라나 번데기 장사가 다녀간 뒤에는 골목 구석에 나뒹구는 종이컵을 걷어 그 아래 가라앉은 국물을 들이켰다. 언젠가는 핫도그 나무젓가락을 주워, 중간에 달라붙은 밀가루를 앞니로 갉아먹다가 멀리서 달려온 누나한테 발길질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은영은 경신이가 이럴 때마다 찢어지게 소리를 지르며 동생의 등짝을 갈겼지만, 어차피 어눌한 경신이는 누나가 아무리 화를 내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아이들이 공터에서 과자라도 먹고 있으면, 그 곁에 딱 달라붙어서 과자와 입을 오고 가는 손동작을 뭐에 홀린 듯 집요하게 쳐다보곤 했다. 자신의 계란과자 봉지를 쫓아오는 경신을 보고, 영우는 재미있는 놀이를 생각해 냈다. 과자 한 개를 제 입에 넣고 곧이어 한 개를 땅바닥에 버리는 것이다. 영우가 과자를 떨구면 경신이 잽싸게 그걸 집어 먹었다. 다시 한 개를 먹고 하나를 버리면 이번에도 경신이가 눈을 부릅뜨고 과자를 찾아다녔다. 경신의 반응에 재미가 들린 영우는, 아예 먹는 것도 잊은 채 공터 여기저기로 과자를 던지기 시작했다. 경신이도 영우도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때 어디선가 은영이 달려와 영우를 밀치고는 이제 막 경신이가 집으려던 노란 과자를 운동화로 밟아버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영우가 화가 나 은영에게 성질을 내려는데, 갑자기 경신이 더 큰 소리로 날뛰기 시작했다. 경신은 영우가 아니라 제 누나를 머리로 받아버렸다. 누나를 밀쳐낸 뒤 경신은 누나의 운동화 아래에서 가루로 변한 계란과자를 조심스레 손바닥에 긁어모아서는 제 입에 털어 넣었다. 경신의 집요함에 기가 찬 듯 뺑둘러 구경하던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탄성을 터뜨렸다.
경신이가 계란과자보다 더 좋아했던 것이 바로 떡볶이였다. 떡볶이가 생각날 때면 경신은 문방구 앞을 서성거렸다. 애들이 다 먹고 물러나면, 아줌마가 접시를 치우기 전에 뛰어들어와 그릇을 핥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길에 버려진 쓰레기와 달리 떡볶이 접시는 주인이 따로 있었던 터라, 기절할 듯 놀란 아줌마한테 결국 경신은 호되게 얻어터졌다. 경신은 플랜 B를 발동했다. 잠자코 기다리다가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일행인 척 함께 들어와 다짜고짜 같이 먹는 것이다. 나는 경신이가 노리는 그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접시를 받자마자 개수를 세느라 누가 옆으로 다가오는 줄도 몰랐던 나는 웬 꼬챙이가 내 떡볶이를 찍어 올리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경신이가 어디선가 뿅 나타났다. 그 애는 일말의 양해도 없이 내 떡볶이 접시를 비워버렸다. 순식간이었다. 다 먹은 경신이 말도 없이 사라진 후에도 쉽게 놀라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빈 접시를 바라보며 그만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날의 충격 때문에, 한동안 떡볶이를 먹으러 가면 뒤쪽을 흘깃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경신이가 문 앞에 있으면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들어올 때는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나기도 했다. 급습에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었지만, 떡볶이에 대해서는 모종의 체념이 자라났다. 경신이가 나타나면 담백하게 마음을 접고, 그쪽으로 접시를 밀어주는 것이다. 소신에게는 아직 다섯 척의 배가 남아... 아니, 나에게는 아직 50원이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려진 하드 껍질을 핥는 것보다 접시의 떡볶이를 집어 먹는 경신이의 모습이 더 보기 좋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경신이 덕분에 나는 쫄깃쫄깃한 떡볶이를 먹을 때마다, 내 심장도 덩달아 쫄깃쫄깃해지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중학생이 되니, 떡볶이도 진급을 했다. 전골처럼 끓여먹는 떡볶이가 등장한 것이다. 이름만 떡볶이였지, 그것은 문방구 아줌마가 접시에 덜어주던 그것과는 아예 다른 음식이었다. 찌개처럼 국물도 흥건했고, 무엇보다 떡 말고도 들어가는 것들이 많았다. 라면, 쫄면, 만두, 계란처럼 그 자신만으로도 이미 독립된 명성을 자랑하는 온갖 식재료들이, ‘사리’라는 이름으로 떡볶이와 대승적 협업을 감행했다. 마이클 잭슨과 전설들이 한 데 모여, <위아 더 월드>를 떼창 하는 스케일이라고나 할까.
집에 가려면 시장통을 거쳐야 했는데, 거기가 바로 우리 동네 즉석떡볶이의 메카였다. 북적이는 시장 골목 양쪽으로 철희네, 삐삐네, 영희네, 철호네 등 단체로 같은 작명소를 다녀온 것처럼 비슷한 이름의 떡볶이 가게들이 즐비했다. 그중에서 우리는 삐삐네와 철희네의 단골이었다.
철희네는 넓은 매장 한 귀퉁이에 DJ 박스가 있었다. 거기 가면 떡볶이도 먹고, 음악도 듣고, 무엇보다 DJ 오빠의 얼굴을 구경할 수 있었다. 시장은 화개장터처럼 인근 두 여중의 하굣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작되었기에, 거기서는 양 학교의 수다쟁이들이 모여 이글거리는 호기심을 경쟁적으로 DJ에게 날려 보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에 신청곡을 적어 DJ에게 주면, 오글거리는 몇 마디 멘트와 함께 요청한 최신가요가 흘러나왔다. 그래 봤자 주문한 냄비가 테이블에 도착하는 순간 노래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었다.
처음에는 DJ에게 집적대는 맛에 철희네를 애용하던 우리들은, DJ 박스가 비어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점차 실리를 쫓기 시작했다. 결국 맛이었다. 학창 시절, 누구에게나 영혼을 달래주었던 자신만의 떡볶이 성지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에게 그곳은 삐삐네였다. 삐삐네는 철희네보다 가게도 작았고, DJ 박스도 없었다. 삐삐네의 경쟁력은 맛이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냥 거기가 제일 맛있었다. 겉보기 등급도 비슷하고, 들어간 재료도 완벽하게 동일했는데, 신기하게도 맛이 달랐다.
주인아줌마는 <개구리 왕눈이>의 투투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생긴데다가, 매우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몇 인분을 시키든 주문한 아이들의 몰골을 살핀 뒤, 조금 넉넉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냄비를 채워주었다. 며느리에게도 알려줄 수 없다는 적갈색 고추장이 영업비밀이겠지만, 정작 내가 그 집에서 제일 반해버린 것은 따로 있었다. 단무지였다.
삐삐네 단무지는 뜨겁고, 맵고, 말랑말랑한 떡볶이와 완벽하게 궁합을 맞추었다. 차갑고, 달착지근하면서, 아삭아삭했다. 미술 시간에 배운 색상표에서, 마주 보는 보색끼리 만나 서로의 존재감이 극대화되는 원리와 비슷한 것이었다. 날숨을 헐떡이며 뜨거운 떡볶이를 입에 넣은 뒤 냉큼 단무지를 한두 조각 그 위에 얹으면, 입 속에서 둘이 만나 으깨지고 뒤섞이면서 새로운 맛의 요리가 즉석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이름이 즉석떡볶이일지도!) 스뎅 컵에 파인애플맛 쿨피스를 따라 입가심까지 하면, 그야말로 천국의 근처까지 도달하는 열락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중학생들에게 즉석떡볶이는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지만, 매일 먹기에는 용돈이 모자랐다. 자금이 마련된다고 능사도 아니었다. 혼자 먹을 수도 없고 포장도 불가능하니, 먹고 싶은 날에는 회식처럼 참여자들의 들뜬 마음을 모아야 했다. 커다란 냄비에 내 몫과 네 몫의 재료를 한 데 섞고, 염치를 지키며 우정을 나누는, 즉석 떡볶이는 그런 축제의 음식이었다. 미광은 그 흥겨운 잔치에 등장한 무뢰한이었다.
떡볶이를 좋아했던 미광이 ‘삐삐네 한 번 뜨자’며 아이들을 들쑤셨다. 나는 미광과 친한 사이가 아니었는데, 그날은 어쩌다 보니 가는 방향이 같아서 엮였다. 미광과 함께 한 그날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녀에게는 남들은 갖지 못한 어마어마한 능력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엑스맨들을 배출한 초능력 학교가 자기 모교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미광은 남들보다 세 배 많은 음식을, 보통 사람의 세 배 속도로 삼킬 수 있는 가공할 능력의 보유자였다.
한 테이블의 정원은 네 명. 그날 우리는 떡볶이 4인분과 라면사리 두 개, 만두 네 개, 달걀 네 개를 주문했다. 제일 큰 냄비가 버너 위에 올라갔다. 국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자, 뱃속의 소화액이 미리부터 발사를 준비했다. 그 순간! 미광이 젓가락을 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익지 않았다. 기습이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떡이 말캉해졌는지 젓가락으로 한번 찔러보고는 1분만 더 기다리자고 민주가 말까지 했는데, 그 사이 미광이 한 냄비의 떡볶이를 모조리 마셔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왜 인간의 음식 섭취 양상을 묘사하기 위해 기상현상을 들먹였는지 대번에 공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폭풍흡입.
나머지 셋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빈 냄비만 국자로 이리저리 뒤적였다. 다른 건 그렇다고 쳐도, 네 명이 네 개를 주문한 달걀과 만두는, (사회적 통념에 입각했을 때) 적어도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허기진 위세포가 피켓을 들고 항의했다. 하지만 미광은 우리의 안일함을 비웃듯, 첫 젓가락을 꽂는 그 순간 이미 달걀과 만두부터 박살 내어 원형을 알 수 없게 국물에 섞어 버렸다. 그리고 모든 것은 터보 단추를 누른 진공청소기처럼 미광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어떡하지? 더 먹을까? 나머지 셋은 떨떠름하게 의견을 물었다. 먹은 게 없으니 ‘더’ 먹는다는 것도 틀린 말이었다. 미광은 ‘나는 됐다’며 반대표를 던졌다. 다수결에 따라 우물쭈물 추가 주문을 넣었다. 다시 새 냄비가 도착하자, 자기는 괜찮다던 미광이 이번에도 출동했다. 아무리 우리가 위기감에 몸을 떨며 젓가락질에 속도를 내봤자 어림도 없는 싸움이었다. 메뚜기 떼가 휩쓸고 지나간 밀밭처럼, 냄비는 곧 바닥을 드러냈다. 떡볶이 대신 분노와 허탈이 내장을 채웠다.
계산할 시점이 되자 미광은, 자신은 분명 추가 주문에는 반대표를 던졌기에, 1인분 값을 내는 것이 맞다면서 똑부러지는 계산을 마치고 지갑에서 동전을 꺼냈다. 머릿속에서 지킬과 하이드가 멱살을 잡고 싸우기 시작했다.